천안 성거산 주변에는 1800년대 초부터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온 신자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들이 곳곳에 7개가 산재되어 있었다. 이곳으로 모여든 이들은 이 척박한 골짜기에서 움막을 짓고 생활하거나 화전을 일구어 얻은 변변찮은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던 산골 신앙 공동체였다. 실제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이 깊고 높은 산중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성거산 교우촌은 산골이면서도 주변의 다른 신앙 공동체들과 연락을 취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런 까닭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성거산에 와서 휴식과 사목 활동을 하며 편지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냈고, 주변의 공주와 선천, 충북 배티, 경기도와 경상도의 교우촌들과 연계도 가능하였다. 이곳에서 활동한 성직자는 다블뤼 주교, 최양업 신부, 메스트르 신부, 칼레 신부, 페롱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등이 있다.

특히 소학골 교우촌은 칼레 신부가 1864-186610월까지 사목 중심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칼레 신부가 파리의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보낸 1867213일자 서한에 소학골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소학골은 독수리 둥지처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랑이가 득실거리고, 숲이 우거진 산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찾아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러나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아주 좋은 피신처입니다. 마치 들짐승처럼 사방에서 쫓기는 선교사가 평화로운 이곳에서만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어느 누구에게 들킬 염려가 없이 초가집에서 나와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도 있고,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병인박해(1866) 때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는 동료 선교사들이 곳곳에서 체포되자 순방 여행을 중단하고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 교우촌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포졸들에게 쫒기면서 연풍을 지나 괴산과 진천을 거쳐 배티 삼박골 교우촌에 머무르다가 마지막으로 소학골에 와서 페롱 신부와 함께 잠시 은신하다가 결국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 이곳은 박해가 끝난 뒤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거처하거나 순방하던 곳이다.

서들골(서덕골) 교우촌은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백부 최영렬이 1827년 고향 청양 다락골로부터 이주해 와서 살던 곳이다.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최양업 신부의 부모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 부부가 순교한 이후 최양업 신부의 둘째 아우인 최선정 안드레아가 이곳에서 맡겨져 잠시 성장한 곳이며 최양업 신부도 종종 드나들었던 곳이다. 이 교우촌을 중심으로 병인박해 이후부터 계속 생겨난 교우촌들은 점점 통폐합 되었다가 1920년에 와서는 7개의 교우촌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병인년(1866) 10(음력) 소학골과 서들골, 주위의 교우촌이 발각되기 시작하면서 계속 포졸들이 덮쳐 이곳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잡혀 그중 5명은 공주 감영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5명은 서울 포도청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소학골에서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순교한 배문호 베드로와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나자로, 고요셉과 채씨 며느리는 성거산 성지 제1줄무덤에 안치되었다. 성지 전체로는 제1줄무덤에 38, 2줄무덤에 36기의 묘봉이 있는데, 시신(屍身)들이 겹쳐 있어 실제 안장된 순교자는 훨씬 많다고 한다. 이 이외도 순교자들의 시신을 현재 이곳 성지에 이전(移轉)한 여섯 분들의 증언과 순교자들 후손들의 구전으로 전해 오는 이야기에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이곳에 묻혀 계신다고 한다.

성지 현황을 보면 제1줄무덤에서 제2줄무덤까지의 거리가 약 530m 정도로, 가는 동안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14처가 설치되어 있고, 넓은 성모광장에는 야외제대와 신자석이 마련되어 있어 야외미사를 봉헌하기에 불편함이 없다. 또한 순례자들이 식사를 하고 쉴 수 있는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 2줄무덤부터 시작하는 순교자의 길에는 총 55개의 대형 호롱등이 설치되어 있는데 각 호롱등에 한국의 103위 성인과 성거산(소학골) 출신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아래쪽으로 20115월에 봉헌식을 가진 기념 성당이 있는데 아래층은 수산나 피정의 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소학골 교우촌에는 박해 때 교우들이 살던 집터와 태풍에 의해 쓰러진 돌배나무가 남아 있어 오랜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참조: 한국천주교성지순례, 2019, 67; 차기진, “또 다른 사적지와 성지순례의 의미”, 사목 256, 20005월호; 성거산성지 홈페이지 http://www.sgm.or.kr/)

 

성거산 성지로 올라가기 전 산 아래 쪽에 성거산 성당이 있다. 성당 안에서 보면 보통은 벽에 십자가가 걸려 있지만 이곳 성당 안 전면이 투명유리로 되어 있어서 성당 외곽에 세워진 예수님상이 보이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성당을 지나 성거산 쪽으로 올라가면 성거산 성지 입구에 줄무덤과 교우촌 터에 대한 안내가 나와 있다. 

 

 

 

제1줄무덤

 

제2줄무덤

 

제1줄무덤에서 제2줄무덤으로 가는 길에 성모광장이라는 야외 미사 장소가 나온다. 

 

 

 

이곳 성모상 앞에 코로나로 인해 정상적인 주회합을 못하고 있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초를 봉헌하며 코로나 종식과 창조질서의 회복을 위한 인간의 회개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성모광장을 나오면 제2줄무덤을 거쳐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 길을 따라 103위 순교성인과 성거산 순교자의 이름이 새겨진 55개의 대형 호롱등을 볼 수 있다.

 

 

대형 호롱등이 끝나는 지점 아래 쪽으로 기념 성당이 지어져 있다. 위층이 성전이고 아래층이 수산나 피정의 집인 듯하다.

 

 

이곳을 지나면 현재 터만 남아 있는 교우촌의 흔적만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