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후에 최양업 신부가 귀국하여 12년에 걸친 힘겨운 사목활동 끝에 1861년 과로와 식중독으로 숨을 거두고 배론 신학교 산기슭에 안장되었다고 알려진다. “평야지대에서 사는 신자들은 신자 아닌 것처럼 냉담하여 살지만, 산골에 피신하여 사는 신자들은 아주 열심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땀의 순교자로 알려진 최양업 신부가 이 내용의 편지글을 쓴 곳은 도앙골이라 불리는 부여의 산골짜기였다. 도앙골은 부여, 보령, 서천의 3개 시군이 맞닿은 월명산 아래 깊은 계곡 안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산길이 맞닿는 계곡의 막다른 지점으로, 하부 내포의 산간 지역에 숨어 살던 신자들이 연통하기 수월하였다.

곧 도앙골은 최양업 신부가 중국에서 14년 만인 1849년 말에 사제가 되어 돌아와 전국의 신자들을 찾아 사목하다가 10개월 만인 1850101일자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수로 가신 스승 르 그레즈와 신부님에게 그동안의 활동보고를 올리는 첫 번째 편지를 쓰신 곳이다. 최양업 신부가 이곳에서 작성한 편지는 선종하기까지 12년 동안 스승 르 그레즈와 신부와 리부아 신부에게 보낸 13(세 번째 편지는 유실) 가운데 가장 길고 자세하며 구구절절 자상하고 눈물겨운 내용들을 담았다.

대전교구 윤종관 신부(현재 원로 신부)는 공주본당이 설립된 1897년 이전에 작성된 1880년부터 1890년대 공소 사목 자료에는 도앙골 신자수가 43명으로 기록될 정도로 신자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지요. 당시 신자였던 경주 최 씨 친척 집에서 최 신부님께서 첫 편지를 작성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도앙골에 1970년대까지 가난한 5-6가구가 살았는데 그들 가운데 경주 최 씨가 누대에 걸쳐 살았던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잠시나마 편안한 마음으로 편지를 쓸 수 있는 곳은 바로 경주 최 씨 친척이 살던 속칭 뗏집이 분명합니다. 그곳에 탁덕 최양업 시성 기원비’(鐸德 崔良業 諡聖 祈願碑)를 세운데 이어 2011년 여름에 대전교구 이범배 신부님이 30평 규모의 기도하는 우애의 집을 지었지요.”

아울러 윤신부는 도앙골과 삽티 마을은 고개 넘어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옛 천주교 신자들이 비밀리에 연통하며 신앙생활을 하였음을 여러 정황으로 짐작할 수 있다때문에 삽티와 도앙골을 성지로 성역화하고 두 마을을 잇는 산길을 순례 코스로 조성하는 일은 천주교 역사복원과 지자체의 관광상품 개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부여 도앙골(내산면 금지 1)-삽티(홍산면 상천 2) 순례길은 3남짓한 산길을 걷는 코스로 하부내포성지의 순례길이다.

참조: 한국천주교성지순례(2019), 62;   대전일보 2014-08-21기사 믿음 그리고 거룩한땅 순교성인 발자취 남아”, 최신응 기자(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1132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