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고개라고도 불리는 삽티(揷峙)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와 내산면 금지리 사이의 경계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부여군과 보령시의 경계를 이루는 월명산과 천보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남쪽과 북쪽 계곡에는 조선시대에 교우들이 숨어 살면서 삽고개를 사이에 두고 연통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삽고개로부터 남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에도 교우들이 숨어 살았는데 이곳에 삽티 교우촌이 있었다.

삽티 성지에 조성된 ‘황석원(黃錫園)’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는 삽티성지 종합안내도에는 도앙골성지에서 삽티성지로 가는 도보순례길 안내가 있다. 바로 옆에 ‘황석두 루카 성인 안장지 삽티성지 안내’ 내용이 있어서 그대로 옮겨본다.

“이곳 삽티 계곡에는 1790년대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하여 숨어 살았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선각자 이존창 알로이시오 공사가 선생이 고향 예산 여사울에서 배척 받은 후 홍산 지방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이존창 선생의 비밀 선교활동에 의해 홍산지방에서 천주교 신앙을 지니게 된 교우들이 숨어 살기 시작한 곳이 이곳 삽티 계곡입니다. 그 후 1850년대에 충북 괴산 연풍에서 배척 받은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가족들을 이곳 삽티에 이주시켰습니다. 황석두 성인의 양자 황천일 요한과 조카 황기원 안드레아가 삽티 교우천에 살았습니다. 황석두 성인은 인근 30여리 상거의 산막골에 선교 거점을 삼은 선교사 페롱(Feron) 신부를 보필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석두 성인은 이곳 삽티를 중심으로 하여 인근 산골 교우촌들을 순회하여 신자들을 지도하였습니다. 옥산의 부덕리와 내산의 도앙골과 외산의 북두머니, 내대, 거칠, 옥가실 등 산골의 신자들을 지도하였습니다.

병인박해를 당하여 1866330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함께 순교한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양자 황천일과 조카 황기원이 수습하여 그해 529일에 여기 삽티에 안장하였습니다. 그 후 1866년 말에 홍산 현()에 체포된 황천일과 황기원은 서울에서 사형 당하여 순교했습니다.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삽티에 안장한 사실에 대해서 황기원의 딸 황 마르타가 1922년에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병인년의) 416(양력 529)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신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 사피(즉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시복조사 1922년 재판 34회차 제23조목 황 마르타의 증언정리번호 220)

일제강점기까지 삽티에 거주하며 옹기를 굽고 살던 신자들이 떠난 이후 이곳의 교우촌은 사라졌습니다. 1964524일에 산지 개발 작업 중 허물어진 무덤에서 성물(聖物)들이 발굴되었습니다. 2012년부터 천주교 대전교구는 성물 발굴지점을 중심으로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황석원’ 끝부분에 대형 십자가 앞에 조성되어 있는 ‘황석정(黃錫亭)’ 안에 하부내포성지 전담신부가 작성한 ‘삽티 교우촌 황석두 루카 치명성인 안장지’라고 소개된 안내 내용이다.

“이곳 삽티 계곡에 1780년대 말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숨어살았다. 1850년대에는 충북 연풍에서 신앙의 이유로 배척받은 황석두 루카가 하부내포의 홍산 지방으로 피신하여, 양자 황천일 요한과 조카 황기원 안드레아를 삽티에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1866330일 갈매못에서 치명한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황천일과 황기원이 그해 529(음력 416) 이곳 삽티에 모셔다가 안장했다.

그로 말미암아 황천일과 황기원이 홍산현에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1866년 가을에 서울 절두산에서 치명하고, 삽티의 황씨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피신했다.

황기원의 딸 황 마르타가 16세의 나이로 이 사실을 목격하고, 1922년 시복조사재판에서 72세 나이로 증언했다. “병인년 416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신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시복조사재판 34회차 정리번호 22)

황 마르타의 증언 이후 이곳 삽티의 황석두 성인 안장 묘를 찾아 돌보거나 옮긴 기록이 없다.

19645월 이곳에서 산지개발작업 중, 스러진 묘터에 묻혀있는 항아리 속에서 십자고상과 성모상과 묵주 등 성물을 발굴했다. (현재 절두산 순교기념박물과 소장) 그 발굴지점을 교회사학자들은 황석두 성인의 안장지라 신빙한다.

그 안장 신빙지점은 1990년대에 타지인들의 문중묘역으로 바뀌었다. 하여, 황석두 성인의 유해는 안타까이 유실되었다.

그 성물발굴지점으로부터 100미터 거리의 봉우리에 2018년 부여군이 십자가를 세우고 황석두 성인의 안장기념 자리로 표시했다. 십자가를 향하여 순례자들이 기도하는 이 자리를 황석원黃錫園이라 일컫고, 천주교 대전교구의 역사를 함께하는 제대를 안치하여 황석정黃錫亭을 건립했다.”

 

이곳 경당은 ‘성석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삽티성지의 옥외 제대는 1933년부터 20여 년 동안 대전교구 대흥동 주교좌성당의 중앙 제대였다. 거룩하게 축성된 이 제대에서는 그동안 제2대 교구장 황민성 베드로 주교를 비롯해 대전교구 역대 주교들의 착좌식과 대전교구의 사제 서품식이 열렸다. 또 수많은 견진성사 등 교구의 공식 전례가 이 제대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던 제대는 1936년 내부 공사를 하면서 더 커다란 제대에 자리를 내주었다. 대전 시내 작은 성당으로 이전된 이 제대는 10여 년 동안 미사성제가 봉헌되며 신자들에게 은총을 베풀었다. 이윽고 제대는 다시 새 제대에 밀려 18년 동안 성당 화단의 조경석으로 모퉁이의 버려진 돌처럼 놓였다.

이 제대를 황석두 성인의 빈 무덤 자리에 옮겨 와 거룩한 은총의 도구로 만든 이는 2016년 당시 삽티성지 담당 윤종관 가브리엘 신부(원로 사목자). “교구의 역사를 함께했고 거룩하게 축성한 제대가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그 돌처럼 방치된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제대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그리스도의 몸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죠. 성인의 유해조차 찾지 못한 우리 교회와 지킬 걸 지키지 못하며 살아가는 오늘 신앙인들의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거룩함을 지키지 못한 것을 통탄한 윤 신부는 그 의미를 잊지 말자며 제대의 이력을 돌에 새겨 제대 앞에 놓았다.

가로 221cm, 세로 90cm, 높이 23cm 크기의 상석은 뒤집힌 채 놓여 있다. 오랫동안 방치되다 보니 본디 윗면이 훼손되고 세월의 흔적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개를 숙여 제대석 아랫면을 보면 모퉁이에 새긴 십자가가 아직도 고고한 자태로 남아 있다. 다섯 개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상징한다. 가로 55cm, 세로 83cm, 높이 76의 받침돌에는 성지의 상징인 금빛 십자가를 새겼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그들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2-23). 성경 말씀처럼 삽티성지의 옥외 제대는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황석두 루카 성인의 믿음과 삶, 그리고 그리스도 자체이며 성당의 중심인 거룩한 제대의 의미를 상기시켜준다.

[출처: 경향잡지, 20205월호, 김민수 편집장]

 

제대 뒤 비석에는 성인의 신앙 고백인 나는 천당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비록 만 번을 죽더라도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를 새겨 놓았다.

 

“2012년 대전교구 윤종관 신부는 성물 발굴지에서 분할된 지번의 산지를 매입하고 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2016년 성지 조성을 시작하였다. … 현재 삽티 성지와 월명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도앙골 성지를 잇는 도보 순례길이 마련되어 있어, 숨죽이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선조들의 마음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출처 : 2020719일 연중 제16주일 대전주보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