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레지오 마리애 월간지 명예기자 연수 미사강론(10.23)2020-11-06 18:42
작성자 Level 9

레지오 마리애 월간지 명예기자 연수미사
– 연중 제29주간 금요일(2020. 10. 23) –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49-51)고 하셨다. 말은 그 표현 자체보다는 그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하게 될 때 그 메시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 곧 죽음의 길로 향하는 여정에서 비장하게 토해놓는 말씀이다. 그분은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것을 느끼셨고, 그러기에 예수님은 더욱 절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뇌와 절박함과는 달리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왔지만, 아직도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시간이 하염없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거부하는 이들 사이에 분열이 생기고 정통과 이단 간의 투쟁이 있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런 분열과 분쟁을 원하셨다기보다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분열되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그저 조용하고 평온한 결과만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종교의 메시지는 단순하게 마음의 평화만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으되 이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데까지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온전히 뒤집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삶에 분열을 주고, 변화를 위해서는 삶의 정화와 단호한 칼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불’과 같아서 마치 불이 광석을 제련하여 금속을 불순물에서 갈라내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삶의 깊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우리의 잠자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성숙을 위한 아픔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두 사람이 세 사람을 반대하여 갈라지게 되고, 모녀간에, 고부간에 생기는 불목은 진실한 삶과 진정한 평화를 얻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듣고,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열매를 맺기 위해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 시간은 마냥 편하기만 바라고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우리를 위해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절박하고 비장한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잘못된 삶을 불살라 정화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이나 불처럼, 내면에 타오르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과 단호한 결단보다는, 그저 편안하고 듣기 좋은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며, 싸늘하게 식어버린 막연한 동경심 밖에 남아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여태껏 제자들을 상대로 줄곧 말씀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제는 그들과 더불어 군중들로 그 대상을 확대하신다(루카 12,54). 구원과 심판의 불을 지르러 오신 당신의 사명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청중을 나무라시기 위해 모든 사람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일기예보를 비유로 제시하신다(12,54-55). 일기예보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늘 자연을 살피면서 기후를 예측하였다. 이스라엘의 서쪽에는 지중해가 있었기에 바다가 있는 서쪽에서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올 것을 예상하였고, 남쪽의 사막 지대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더워질 것을 예측하였다. 하다못해 노인들이 신경통을 호소하며 삭신이 쑤신다고 하면서 곧 비가 올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날씨에 대해서는 미리 대비할 줄 알면서도, 시대와 진리에 대한 분별에 있어서는 무관심하여 무지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영적 무지를 우회적으로 짚고 계신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 하늘과 땅의 변화를 풀이할 때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떻게 이 시대의 징표,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가르침과 기적을 주신 것을 보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느냐는 질책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시는데, 이때 말씀하시는 위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속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선한 척하는 태도가 아니다. 예수님과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 들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리킨다.
그래서 어제 복음과 연결지어 볼 때 ‘이 시대’란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말한다. 이미 예수님의 활동 시기부터 ‘분열’을 가져다주는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말하셨기 때문이다(12,51-53). 복음은 그리스어로 “이 시대”를 “카이로스(καιρός)”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성경에서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기나 때를 가리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루카에게 있어서 ‘이 시간’이란 예수님의 시대로 구원의 시대를 의미한다. 우리로 치면 하느님과 관련된 충만한 시간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종말론적으로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의 때’를 가리킨다. 사람의 운명과 관련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결정적 시점’이다. 따라서 ‘이 시대’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다가올 심판을 준비해야 할 모든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구원활동을 펼치고 계시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해야 하며,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는 현시대는 구원받기 위해 회개해야 하는 시기임을 깨닫고 그분의 복음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위선’은 하늘과 땅의 기상은 분별한다고 하면서도 진정 알아야 할 이 시대의 다가올 심판은 깨닫지 못하는 실제적인 어리석음을 가리킨다. 그래서 여기서의 ‘위선자들’이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하는 자들’을 가리킨다(12,56).

오늘 복음은 또 다른 부분이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12,58) 늦기 전에 화해하라(12,57-59)는 내용은 마태 5,25-26에도 병행해서 나온다. 단지 마태오는 이 말씀을 산상설교에서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제단에 예물을 바치라는 말씀(마태 5,24) 뒤에 연결 지음으로써 이웃과의 화해를 강조하는 교훈으로 제시한다. 반면에 루카는 평지설교가 아닌 예루살렘 상경기에 이 내용을 넣음으로써 ‘시대’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말씀과 회개하지 않으면 갈릴래아 사람들처럼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마태 13,1-5) 사이에 배치해 넣음으로써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부분은 어쩌면 나와 관련된 특정한 인물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을 더 깊이 들여다 보거나 심층심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기 자신과의 화해일 수도 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숙제는 이웃보다도 오히려 자기 자신과의 화해인 것 같다. 이것은 어쩌면 평생에 걸친 숙제일 듯하다. 우리가 법정으로 가고 있는 동안 적대자와 화해하라고 예수께서 요구하신다면(12,57-59), 그것은 분명 우리가 우리 내면의 적대자와 대화를 하고 그와 화해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자신의 내적인 심판자(현실적으로 드러난 자아에 영향을 주는 초자아)가 우리를 자기 비난의 지하 감옥으로 그리고 강박과 두려움의 감옥으로 감금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우리가 일단 이 내적인 감옥에 갇히면 결코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잘못의 주변을 맴돌며 어두운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찾지 못하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의식에서부터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나의 자아를 위협하는 요소인 자신의 그림자를 정직하고 겸허하게 대면하여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만이 나의 참된 자아를 실현해 갈 수 있다.그러나 그게 어디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겠는가?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서 도망치고 내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외면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화해, 곧 자신과의 진정한 일치로 인해 주어지는 평화가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힘의 근원은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에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스스로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인식의 함정’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솔깃한 ‘처방’만 찾다가 정직한 ‘지혜’의 가장 깊은 측면을 놓친 채 겉으로 드러나는 고정관념에 더 심하게 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사람들이 자주 간과하는 진정한 ‘삶의 지혜’를 위해 두 가지 요소를 말하고 있다.
첫째, 삶의 지혜란 그저 이론적인 지식이거나 자신의 ‘인격’과 무관한 차원의 능숙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의지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를 통해 실천하는 ‘실천적인 앎’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인간이 이 세상에서 행하고 체험하는 도덕과 행복은 원래 불완전하며, 오직 하느님과의 최종적 만남에서만 ‘완전한 행복’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인간적 지혜’와 ‘인간의 행복’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통찰을 상기시켜준다. 예수님께서는 자연의 징조를 잘 알면서도 ‘시대’,곧 지금 이 시간을 풀이할 줄 모르는 자들을 ‘위선자’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표현으로 지식은 있으되 삶의 지혜에는 무지한 자들을 딱하게 여기는 한편, 교묘하게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외면하려는 그들 마음 속의 유혹을 날카롭게 벗겨 내신다. 그러면서 ‘삶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오히려 법정으로 가기 전에 화해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라고 깨우쳐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시는 이 화해는 자신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힘의 근원은 하느님의 자비에 있음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이미 법정으로 넘겨지면 더 이상 자신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듯이, 우리 시대가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살아 계시며 구원을 베푸시고 심판을 집행하고 계시는 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영적으로 빚을 진 사람은 빚을 갚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어쩌면 끊임없이 주님께 자비와 도움을 구해야 할지도 모은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카이로스(καιρός)’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지금, 이 시대”란 바로 현재의 시간이다. ‘현재’(present)란 ‘선물’을 뜻하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 이 시간이 주님께서 은총으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자각이 없다면 그냥 아무 의미 없이 흘러만 가는 시간, 통제되지도 않고 허송세월로 보내는 시간일 뿐이다. 이를 성서에서는 ‘카이로스’와 반대의 시간을 사는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 더 나아가 하느님과의 ‘일치’란 ‘화해’를 통해서 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바에 따르면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과의 화해 또한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시는 일치”(에페 4,3)를 위한 노력 또한 성령에 힘입어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타인과의 화해와 일치는 고사하고 자신과의 화해와 일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참된 자기 실현도 어려워지거나 비틀어진 자아에 의해 또 다른 괴물의 모습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