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서울 세나뚜스 직속 꼬미시움 간담회 훈화(10.24)2020-11-06 18:42
작성자 Level 9

서울 세나뚜스 직속 꼬미시움 간담회 훈화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복음

팔레스티나에서는 간혹 포도원에 다른 과일나무들도 함께 심는다. 무화과나무는 해마다 열매를 맺는 나무이기 때문에 정상적이라면 묘목을 심은 지 삼 년 뒤에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주인은 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고도 삼 년 동안이나 열매를 기다렸으나 이 무화과나무는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고 열매를 맺지 않았다. 무화과나무는 원래 땅의 거름기를 많이 흡수하는 수종인지라 주변의 다른 묘목들에 비해 더 많은 양의 거름기를 빨아들인다. 그래서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이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라고 명령한다. 이 나무가 다른 포도나무들에게 돌아가야 할 땅의 거름기를 빼앗아 가면서도 열매는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가 되었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 몹쓸 무화과나무를 보면 당장 자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텐데,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자기가 나무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어 열매를 맺도록 하겠으니 한 해만 더 참아 달라고 기회를 요청한다. 구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포도원에 거름을 준다는 표현은 없다. 더구나 삼 년 동안 열매를 맺지 않고 땅의 거름기만 빨아먹고 있는 무화과나무에 그런 특별대우를 제안한다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라고 하겠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루카 13,6-9)를 통해 회개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역설하고 계신다. 포도 재배인이 간청한 한 해는 회개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집행을 유예해 주신 자비의 기간이다. 그래서 지금 회개하고 열매를 맺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종말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마태 3,7-10=루카 3,7-9; 마태 7,19).

그런데 이 비유는 앞서 나온 두 가지의 끔찍한 사건, 곧 빌라도의 학살사건(13,1-3)과 실로암 탑의 붕괴 사건(13,4-5)과 연결을 짓고 있다. 역사적으로 빌라도는 여러 차례 예루살렘에 군사적으로 무력개입을 통해 유다인들의 피를 많이 흘리게 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인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전해준 것으로 보아, 이들은 죽은 갈릴래아인들과는 동향인이었던 예수님의 동정을 구하는 한편, 학살 책임자인 빌라도에 맞서 그분에게 정치적 평가나 판단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만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고도 어떠한 정치적 판단이나 평가를 내리시기보다는 이를 계기로 그들에게 곧바로 회개할 것을 권면하신다. 인물의 교체나 정치적 제도의 변화에 앞서 하느님 나라의 원리인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눈을 뜨고 이런 가치들에 근본적으로 투신해야 한다는 말씀이겠다. 예수님은 또한 예루살렘 남쪽 실로암 저수지에 있는 탑이 무너질 때 시민 열 여덟 명이 깔려 죽는 이 비극적 사건을 언급하시면서도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13,5)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재난을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꾸기를 자꾸 미루면서 거부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닥쳐올 끔찍한 재난의 표상으로 이용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실로암 탑의 붕괴(13,4-5)처럼 죽음과 심판은 이렇게 갑자기 닥치지만, 이러한 돌발적 참변을 당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다른 모든 시민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당시 현세적 응보(應報)의 개념에 따라, 빌라도의 손에 학살당한 사람들이나 실로암 탑이 붕괴되어 비명에 간 사람들이 마치 잘못 살아서 벌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부인하신다. 아울러 자기들은 그러한 불행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스럽게 여기거나 자기들은 옳게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단순한 견해를 배척하신다. 오히려 더 큰 죄인들은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러한 사고의 순간들이 우리에게는 회개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끔찍한 두 사건을 계기로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는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처럼 하느님의 자비심과 인내하심을 남용하거나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결정적 심판을 받지 않도록 회개를 서두르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회심(μετάνοια, conversio)이란 단순히 자신의 몇 가지 죄스런 행위나 윤리적인 변화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하느님의 정신세계와 함께 돌아가는 것’, 하느님의 뜻과 함께 이루어지는 전인적인 방향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죄에 빠지게 되면 그의 가치 체계는 완전히 뒤집힌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그것이 악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오히려 거짓 환상을 제시하며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다. 그리고 이에 잉여와 부산물로 떨어지는 떡고물에 눈이 먼 이들은 이를 고집스러울 정도로 옹호하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정말이지 회개하기가 어렵다. 좋지 않은 것을 자꾸 고집하다 보면 나중에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조차도 모르기 때문이다.
옛날 어렸을 적에 국정 교과서를 받으면 별책으로 함께 받았던 지리도감이라는 책이 있었다. “어디어디를 찾아라!”고 하면, 얼굴을 지도책에 점점 더 밀착시키며 깨알같은 작은 글씨까지도 척척 찾아내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놀이의 가장 큰 함정은 아무래도 작은 글씨보다는 큰 글씨로 쓰여진 지명에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 아주 작은 글씨로 쓰여진 곳은 기를 쓰고 찾아내면서 사실 눈 앞에 길쭉하게 쓰여진 큰 글씨를 찾는 데는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리곤 했다.
그런데 지금도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하다보면 문득문득 그 지도 속 지명찾기 놀이가 떠오른다. 우리의 여러 가지 잘못이나 버릇들은 곰곰이 따져보면 아주 시시콜콜한 것까지 금방 떠오른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에서 그 전체적인 모양새에 어느 부분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찾아내기란 참으로 어렵다. 설령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직하게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려 해왔던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이 바쁜 세상에서는 심히 부담스러운 작업이다.
오히려 그런 것 말고도 당장 해결해야 할 강박된 방향으로 자신을 숨기며 기억 속에 매몰되어 버린 자신의 본 모습이다. 설령 누군가 그것들에 접근해 올라치면 기겁을 하며 즉각적인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무지하게 자존심 상하고 두려울 정도로 기분 나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상처받은 내 모습이며, 그 상처로 인해 냉혹하고 각박한 세상에 대응하며 만들어진 비틀어지고 왜곡되어 버린 내 자아상이자 인격이기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변화하고 바뀌기를 바랄 때 외형적인 것을 먼저 떠올린다. 외형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모두가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변화, 바로 우리 자신들의 변화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변화의 시작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있으며, 회심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내가 하고 싶은 짓 다 하면서 멋대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만 회개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순진하게 말하는 사람에게도 경종이 된다. 주인이 유보한 마지막 한 해를 우리는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며, 문제는 진정한 회개란 그처럼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끔은 우리의 삶, 우리의 인생 역시 한 판의 장기나 바둑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온갖 유혹과 죄에 둘러싸인 내 영혼을 악마로부터 지켜내는 영신전쟁에서 약한 인간에 불과한 우리들은 자꾸만 잘못된 수를 두는 바람에 불리한 시합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우리 신자들은 마지막 한 수, 절묘한 묘수를 예비한다. 그것을 ‘회개’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실제로 바둑이나 장기에서도 평소 많이 두어 본 사람에게 묘수가 생기지 하수가 묘수를 생각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온 영혼을 바쳐 진정으로 하는 회개 또한 평소에 늘 하느님을 갈망하며 살았던 사람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