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서울 세나뚜스 501차 월례회의 미사강론(10.25)2020-11-06 18:44
작성자 Level 9

오늘은 연중 제30주일입니다.

예수님 당대에는 인간의 잣대로 하느님의 법을 사람이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큰 계명을 따지기보다는 모든 계명을 똑같이 준수하려 했습니다. 당대에는 준수 규정 248조항과 금지 규정 365조항을 합하여 모두 613조항을 율법 규정으로 준수했습니다. 물론 바리사이들 중에는 모든 계명을 포괄하는 핵심 계명을 추구하려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질문한 것처럼 그 가운데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지를 묻는 질문에는, 전체 율법 규정에 통달하지 않고는 답변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지기는 했지만(마태 22,36), 결국 당대에 율법학자들이 오래토록 사색하고 논의하던 물음을 제기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도 딴족을 걸 수 없도록 당대에 열심하다는 신앙인들이 날마다 여러 차례 바치던 ‘쉐마 기도문’에 담긴 신명 6,5의 말씀을 꼽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삐들도 사실은 율법의 정수를 이 한 가지 계명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이어 레위 19,18의 이웃 사랑의 계명을 거론하심으로써 첫째가는 하느님 사랑의 계명에 버금가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제시하시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계명은 이웃도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공평하게 대하라는 황금률의 가르침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루카 6,31)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전통적인 가르침과 당신의 가르침을 대비시킨 여섯 번째 대당명제에서 이웃은 이스라엘 민족이나 친지들만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구체적 지침으로 발전시키셨습니다(마태 5,43-4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존에 따로 따로였던 이 두 가지 계명을 새끼 꼬듯 하나로 단단히 묶어 하나로 만드셔서, 이 두 계명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전하십니다. 예수님은 앞서 산상설교에서 율법이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강조하시면서도(마태 5,17-18), 가장 큰 계명에 대해 질문을 던져오는(22,36) 이 논쟁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겉으로 보기에 구별은 되지만 분리는 할 수 없는 가장 큰 하나의 계명으로 제시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계명 또한 두 가지 관계를 규정해 놓은 계명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계명과 대인관계에서 오는 계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십계명은 탈출기 20장(1-17절)과 신명기 5장(신명 5,6-21)에 나오며, 모세오경 안에서 율법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법전 중 첫 번째 법전입니다: ①십계명(탈출 20,1-17; 신명 5,6-21), ② 계약법전(탈출 21,1-
23,19), ③ 신명기 법전(신명 12-26장), ④ 성결법전(레위 17-26장), ⑤ 사제계 법전(레위 1-16장).
그러나 십계명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헌법이자 근본 원리이지, 구체적 지침이나 벌칙을 담은 법률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백성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법률 내용이 십계명에 이어 자세히 소개되는데, 이 법령집을 흔히 ‘계약의 책’ 또는 ‘계약법전’이라고 부릅니다(탈출 21,1-23,33). 십계명이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에 체결된 계약의 기본적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면, 계약 법전은 이를 일상생활에 적용시키는 세부규정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전례의 첫 번째 독서(탈출 22,20-26)는 계약법전에 담긴 여러 가지 내용 중 사회적 생활에 관련된 규정(22,20-30) 중 일부를 전해준 것입니다. 사회적 법규는 사회적으로 보호해야 할 약자들, 나그네나 이민자(移民者), 과부, 고아, 채무자(가난한 자) 등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당신 친히 약자의 후견인이라고 선포합니다(탈출 22,22). 더 중요한 것은 “약자를 보호하라”라는 요구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겪었던 노예생활의 고난을 되돌아보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고난을 겪어본 자만이 고난받는 자의 절박함을 잘 안다는 말이겠습니다.
실제로 이집트를 탈출해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풍요와 부를 가져다줄 것만 같은 우상들에 빠져 살았고, 예언자들은 줄곧 이를 경계하고 질타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언자들을 통한 하느님의 신탁을 끝내 무시한 결과로 바빌론에 끌려가 유배생활을 하며 혹독한 하느님의 심판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유배기간 중에 그리고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 이들은 바로 우상숭배에 빠져 그동안 자신들과 함께하셨던 하느님을 저버린 것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대까지도 율법의 계명 중에서도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가장 첫 계명으로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부터 예언자들이 지겹도록 꾸준히 질타한 것 또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회적 현실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고대 근동의 다른 민족이나 여타 주변 국가법과는 달리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중요한 내용으로 다루어졌고, 그것은 자기들 또한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의 첫 구절 또한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22,20)고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과부나 고아, 가난한 이들을 거론하시면서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신께서는 기어이 이러한 사회적 약자의 부르짖음을 친히 들어주시는 후견자 역할을 하시겠다고 하십니다(22,21-26).
이처럼 구약의 하느님께서도 당신께 대한 신실함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정신이 율법 안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새로운 계명을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 안에 면면히 새겨져 있던 하느님의 관심을 그대로 드러내신 것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22,40)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눈에 보기에도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백성에게 종교적 열성을 강조하면서도 하느님에 대해 온전하지도 못하고 자기들도 감히 실천 못하고 있는 반쪽뿐인 신심, 하느님께서 사회적 약자들의 후견자 역할을 하신다는 점을 은근슬쩍 지나치고 있는 점을 통렬하게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가까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웃에 대해 배타적이고 폭력적이면서도 자기들의 열심한 신심을 자랑하는 사람들이나 특정 종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이유도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와 하느님 사랑에 대한 고상한 강론을 듣다가도 하느님의 정의나 사회적 비리와 구조악에 대한 내용만 나오면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 또한 성경말씀을 대하는 자신의 반쪽 신심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마테오 리치 신부 또한 중국에서 선교하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어질 ‘인(仁)’이라고 하는 하나의 글자로 풀이했습니다(「천주실의」 7-8). 나아가 성녀 예수 아기 데레사 역시 “서로 사랑합시다. 그것은 이 지상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정도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인간 중심적이고 개인중심적인 근대 문명의 기본 전제와 우리 각자의 자기중심적인 이기심과 종교조차도 이러한 기반 위에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고를 뒤흔드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직접 가르치셨기 때문이 아니라 직접 그렇게 행동하셨기 때문에 더 힘차게 드러납니다. 그분의 사랑은 한때의 객쩍은 낭만이나 즉흥적인 회심이나 이성에 대한 매력에 이끌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의 피상적 사랑을 깨뜨리고, 확신과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실천하는 성경에서의 사랑이 어떠한지 뚜렷이 보여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대부분이 사랑은 그저 ‘매달리는 것’이나 ‘끝없는 희생’과 ‘무한정한 요구’들을 채우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여길 뿐, 부족하고 결점 많은 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보내는 법’을 배우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자식을 그저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여 끝없이 요구하며 매달리기만 할 뿐, 부족하고 결함 많은 모습에 대한 연민감은 지나쳐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은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고 받아주길 바라지요.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이웃사랑의 계명의 기초가 되는 ‘황금률’(“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타인에 대한 관대함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려는 술책이 되고,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실제로는 나를 사랑하고 위로해 달라는 응석에 지나지 않은 유치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지내는 정말로 단순한 사실 중 하나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요구하는 대로 반응해주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내가 바라는 대로 행동해달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사실들을 수시로 잊고 지냅니다. 아울러 살아가면서 다가드는 인간관계의 모든 상황들을 제대로 직면하고 깨끗하게 수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지니는 내적인 존재 가치들과 아름다움이 결코 감소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신뢰와 믿음이 아니라 자기 필요나 이해에 의해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이기적이기도 하거니와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계명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면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나오는 테살로니카 신도들의 믿음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두 번째 전도여행 중 테살로니카를 방문했지만, 바오로를 반대하는 세력 때문에 3주간의 짧은 가르침만을 남겨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강한 믿음을 드러내었고,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 온 지방의 신자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너무나 기쁜 나머지 바오로는 편지를 써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참으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고 있음을 칭찬하는 편지가 오늘 두 번째 독서인 테살로니카 1서(1테살 1,5-10)입니다.
테살로니카 1서의 전체 내용 안에서 볼 때, 믿음이란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희망하며 참된 하느님을 섬기는 것, 곧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하느님을 철저히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1,10). 그래서 사랑에 대한 믿음이란 단순한 감상이나 즉흥적 감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희망 안에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행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곧 자신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취사선택에 따라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충실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독실한 신앙생활을 한다면서도 우리는 온전히 주님의 뜻보다는 자기 의지대로 내 편리와 편협함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전하지 못한 나의 취사선택에 대한 신앙생활로 인하여 하느님의 상은 다른 사람에게 많이 일그러지고 왜곡되어 전달됩니다. 더러는 그것이 이웃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신앙인들은 자신의 기호와 이기적인 마음에서 하느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에서부터 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웃들에게까지 그 마음이 펼쳐 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온전한 믿음은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이 노래하듯이 우리가 믿음, 희망, 사랑 안에서 살아갈 때 비로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