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서울 세나뚜스 501차 월례회의 영적훈화(10.25)2020-11-06 18:45
작성자 Level 9

[영적 독서] “레지오는 지나치게 과격한 사회 개혁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레지오의 활동은 본질적으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추어진 행동이어야 한다. 그것은 각 단원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되어 열정과 사랑의 정신으로 발전해 나간다. 단원들은 꾸준하고도 직접적인 접촉을 통하여 전체 공동체의 영신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활동을 수행하며, 모든 활동을 조용하고 신중하고 침착하게 수행한다. 레지오는 세상의 죄악을 직접 억눌러 없애려는 활동보다는 가톨릭 신앙의 원리와 가톨릭적 온정을 공동체에 스며들도록 만들어, 죄악이 자라기에 알맞은 토양을 제거함으로써, 저절로 소멸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레지오는, 비록 속도가 느리더라도, 열심인 신자로서의 생활과 가톨릭적 이상을 사람들 안에 꾸준히 퍼뜨리는 데 참된 승리가 있다고 본다. 레지오 방문의 본질은 활동 대상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므로, 이 점을 조심스럽게 가꾸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교본 39장 ‘레지오 사도직의 주안점’ 8항 ‘레지오 활동의 본질은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434쪽 15줄~435쪽 2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친밀한 관계를 이루시는 하나의 공동체이시다.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의 사도직의 모델을 찾아야겠습니다. “참으로 효과적인 선교 방법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친밀하게 접촉하는 것뿐이다.”(교본 40장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472쪽 26-27줄).

1) 교황 비오 11세께서는 1926년에 신자들의 전교열을 고취시키기 위해 매년 10월의 끝에서 두 번째 되는 주일을 ‘전교를 위한 기도와 활동의 날’로 정했고, 한국교회는 1970년에 10월을 ‘전교의 달’로 정하여 모든 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왔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고 하신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선교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전파에 무관심한 신자는 죽은 가지에 불과합니다. 살아있는 가지에는 항상 새순이 돋아나게 마련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거나 그저 인간적인 조직체일 뿐입니다.
그러나 세계사를 통틀어 볼 때 ‘선교(宣敎)’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과거 서구 그리스도인들의 무수한 처사들이, 오늘날에 이르러 서구인들은 되도록 자기네 역사와 연결짓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과거 서구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이국 땅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휩쓸려 들었던 경우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중세기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또 종교의 이름으로 이교도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성지탈환의 목적하에 살육을 정당화했던 십자군 전쟁이나, 신대륙 발견 이후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선교라기보다는 선교사의 파견에 앞서 군대와 전함을 보내어 그 지역에서 평화롭게 잘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과 인디언들의 수많은 희생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근세 교회의 선교 확장은 오히려 선교사들에 대한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선교의 본래 목적은 교세확장보다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었습니다. 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대부분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복음화된 모습이라는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모습 안에서 십자가를 드러내 보이기는 해도 십자가를 지는 모습은 아니며, 다른 이들에게 희생과 죽음은 요구해도 자기 자신의 희생이나 죽음의 모습은 보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이란, 그리스도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인종과 문화의 차별이었고, 교회의 제도와 힘을 과시하기 위한 팽창과 통계에 주력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라는 미명하에 그리스도의 본연의 모습만을 왜곡시켰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저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선교란 말은 원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친밀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사 또한, ‘가난한 자’, ‘폭력에 희생당한 자’, ‘억눌린 자’, ‘아무런 희망도 없이 낙담한 자들’에게 있었으며, 그분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친밀하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교본의 영적 독서의 내용 ‘레지오 활동의 본질은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라는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말은 가르칠 뿐이지만 생활의 모범은 사람들을 끌어당긴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는 ‘전교’나 ‘선교’라는 말 대신에 ‘복음화’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신자들에게는 진정한 복음전파가 소위 ‘포교(布敎)’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널리 선전하며 널리 알리는 것도,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것도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선교란 극단적으로 말해 한마디 말도 없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이 세상에 오셨고,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그분의 추종자들이 불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교세의 확장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100% 사람들을 복음정신으로 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화’란 글자 그대로 ‘내 자신이 복음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기도를 매일 열심히 하고, 매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만으로, 자신은 이미 ‘복음화’의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물론 기도를 매일 충실히 바치는 것, 그리고 매주일 미사를 충실히 봉헌하는 일, 이 같은 일은 평신도로서의 기본으로서 그 자체로 주요한 일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복음화’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러한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의 핵심인 자비와 사랑, 관대함과 용서, 하느님의 친밀함을 내가 지금 만나는 가족 구성원들과 직장동료, 이웃들에게 내 삶으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제대로 된 ‘복음화’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더 이상 완전하고 유일한 진리의 소유자인 양 강요하는 자세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에 더 적극적인 순종의 자세로 사람들 사이에 머물면서 그들과 드러나지 않게 함께 살고 함께 괴로워하며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면서 자신의 독선과 편견에서부터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뻗치시는 구원의 손길을 전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해 환자를 간호할 때, 고독한 노인을 돌볼 때, 상심해 있는 친구 곁에 말없이 함께 있어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친밀한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도록 자신을 도구로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이 처한 한정되고 제한된 장소와 환경 속에서도 손과 발이 되어 활동하도록 허락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3)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마르 1,15)는 예수님의 첫 복음은 인간의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자체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이 복음을 온몸으로 깨우쳐야 합니다. 이것을 깨달을 사람은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삶을 기쁘고 의미있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삶에로 우리를 초대하셨고, 바오로 사도 또한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로마 10,14-15). 복음을 접한 이상, 이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는 사람들을 신앙의 공동체로 안내할 뿐 아니라 그 신비로 안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화를 과제로 안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도 스스로 복음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복음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지요. 먼저 복음을 들은 사람이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첫 복음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그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며, 이 땅의 복음화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10월을 전교의 달로 정한 동시에 묵주기도 성월로 정한 이유도, 우리가 묵주기도를 하는 동안에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이웃과 함께 구원되어야 할 우리들의 복음화 사명도 거기서부터 담아져 나오는 것은 아닐는지요. 그래서 오늘은 주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인류가 하느님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러한 사명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결심을 새롭게 하는 날입니다.

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는 이제 영성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하시면서 ‘새로운 복음화’에 대한 언급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복음화”를 고려할 때, 중요한 점 두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이었고, 둘째가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현대사회에 혼을 불어넣어 줘야 한다”고 촉구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해 마음의 깊은 곳까지 잘 알고 현대인이 가진 즐거움과 희망, 그리고 고뇌와 괴로움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동시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런 복음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황께서는 1990년에 ‘교회의 선교 사명’이란 회칙을 통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가르치는 스승보다는 삶의 증거를, 주장보다는 경험을, 이론보다는 실천을 더 믿기 때문에, 선교의 첫째가는 가장 중요한 형태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증거자”라고 하셨습니다.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좀더 적극적인 복음 선포의 비전을 제시하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국가 사회 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말라고, 국가 사회 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하지 말라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182-183항)
이는 교본 제12장 ‘레지오의 외적 목표’ 중 “조국이라는 낱말은 지도에 나타나 있지 않은 영토”라고 하면서 “참된 애국심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란 질문에서 레지오는 “사회 공동체을 위하여 바치는 영성적인 봉사”이며, “이러한 봉사는 신앙이 동기가 되어 우러나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봉사와 봉사를 통한 모든 접촉 기회를 신앙심을 높이는 데 이용해야 한다.” 아울러 “도덕성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교본 121-122쪽)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