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서울 세나뚜스 주간회의 훈화(11.4)2020-11-06 18:46
작성자 Level 9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복음(루카 14,25-3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체적인 삶에 필요한 두 가지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해주신다. 망대를 세우려는 사람의 비유(루카 14,25-30)와 전쟁을 하러 나가는 임금의 비유(14,31-32)이다. 이 두 가지 비유가 말해주는 내용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당연한 내용이다. 무슨 장사를 한다든지, 또 어떤 사업을 하던 간에 우리는 먼저 그 일에 있어서 어떤 투자를 해야 하고 또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점을 따져보지 않고 무턱대고 시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 중에 조금 걸리는 내용이 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 내용이다(14,26). 이와 유사한 말씀이 마태 10,37에도 나오는데, 차이가 있다면, 루카는 가족을 미워하라 하고 마태오는 예수님보다 가족을 덜 사랑하라고 한다. 표현은 다소 이상하게 들리더라도 루카 또한 마태오처럼 사랑에 반대되는 적대적인 표현으로 미워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높은 가치 때문에 그보다는 덜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 구절 한 구절의 의미보다는 복음 전체가 갖는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때로는 혈연관계보다 하느님의 뜻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둔 것이라고 해야겠다. 예수님은 이미 이웃을 가족으로 여겼고 세상을 가정으로 삼았다. 하느님 나라에는 더 이상 가족과 친인척만 생각하는 가족이기주의란 없다.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이제는 나와는 관계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십자가상에서 성부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기셨다.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와 가정을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이별했고, 세상 한 가운데로 출가하셨고,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가정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던지셨다. 그러나 그분은 결국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분의 서원이 채워지기 전에는 결코 축배를 들 수가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양반상놈의 차별구조에 한을 품고 산으로 떠났던 소설 속의 홍길동도, 조선 후기 관료들의 타락에 저항하며 봉건사회의 부조리 척결과 항일운동의 시초가 되었던 동학 혁명군도, 조국의 부당한 식민지 치하에 울분을 터뜨리며 가족을 뒤로 하고 만주로 떠났던 독립군도, 한국의 초기 신앙의 순교자들도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몸 바쳤던 수많은 성소자들도 결국 그 서원이 채워지기 이전에는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포기해야 한다든가 버려야 한다는 말을 단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의미로만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뭔가를 포기하고 버리기 위해서는 포기하고 버린 것보다 더 값진 그 무엇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일은 얻는 것과 잃는 것으로 얽혀 있다. 그러니 반드시 잃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더러는 크게 버려야만 크게 얻을 수 있는 체험도 있다. 하느님과 그분이 원하시는 삶에 대한 체험이 있을 때 큰 포기와 희생조차 감수할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려는 사람의 비유와 진주 장사꾼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이다(마태 13,44-46).

세속에서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중요하겠지만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을 위해 방해가 된다면 무엇을 포기하느냐도 중요하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33)고 하시는 예수님의 이 무소유에 대한 말씀을 적극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을 위해서는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의미가 더 이해하기 쉽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애착이나 욕심까지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보다 더 사랑할 경우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풀어본다면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으로 채워나기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희생이 따를지 예상하고 각오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탑을 세우려면 미리 경비를 계산하고 전쟁을 하려면 미리 승패를 따지듯이(14,28-32),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따르겠는지 먼저 성찰하라는 말씀이다. 일을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완수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군중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 또 많은 기적과 놀라운 사건들을 목격하면서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그저 좋은 이야기만을 듣고 감동만 받으려는 청중으로만 남길 원했으며, 말씀에 대한 순간적인 열정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그저 쉽고 평탄하리라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군중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줄 요량으로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6)고 말씀하신 후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7)고 하신다. 그리고는 결정적으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33)고 하신 것도 무질서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영신수련에서 표현하는 무질서한 애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데는 말씀 묵상이나 마음의 평화만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결국은 선택과 결단이 따르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세상 것들 중에서도 가치가 높은 것일수록 어떤 요행이나 지름길이 있을 수가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이 정말 존경하고 높이 보는 가치, 예술이라든지 그런 경지에 이르기에도 어떤 지름길이란 있을 수가 없다. 어떤 그런 높은 가치를 가진 것일수록 정직하게 노력한 만큼, 또 그만한 어려움들을 이겨낸 만큼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도 요행이나 속임수나 지름길이나 이런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