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서울 세나뚜스 협의회 훈화(11.4)2020-11-06 18:47
작성자 Level 9

1. 모든 성인 대축일

 

위령성월을 시작하는 모든 성인 대축일 하루 전날이 핼로윈 데이였다. 고전 영어에서 성인(聖人, saint)을 가리키는 단어로 핼러우’(hallow)란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 모든 성인을 위한 미사라는 의미의 올 핼러우스 매스’(All hallows’ mass), 그 전날 밤을 올 핼러우스 윈’(All Hallows’ e'en)이라고 불렀다. ‘’(e’en)은 저녁, 밤 또는 전날을 뜻하는 이브’(eve)의 축약형이다. 곧 모든 성인의 날 전야제를 뜻하는 올 핼러우스 이브’(All Hallows’ Eve), ‘올 핼러우 윈’(All Hallow e’en)이 줄어 핼러윈’(Halloween)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다.

매년 10월 말, 주로 미국에서 기괴한 복장과 분장으로 즐기는 축제인데, 모든 성인 대축일 전날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으로 돌아온다고 여기는 켈트 문화에서 유래했다. 이날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쫒기 위해 기괴한 분장을 하고 즐기며, 어린이들은 유령이나 마녀로 분장하고 잭오랜턴(Jack-O’-Lantern)’이라는 이름의 호박등을 켜놓은 집에 찾아가 과자나 사탕을 받는 풍습이 있다. 마치 우리 나라에서는 새해 만복을 기원하며 복조리를 던져 놓고 다음날 찾아가서 복조리 값을 얻어 갔던 풍습과 비슷하게 내가 잡귀들을 쫒아주었으니 과자나 사탕을 내놓으라는 식이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이질적인 문화화 합쳐져서 이상하게 변질이 된 10 31일이 바로 핼러윈 데이(Halloween Day)’이며, 가톨릭에서 위령성월을 시작하는 모든 성인 대축일 전날 축제이지만 전례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

 

교회는 오곡백과를 추수하는 11월을 위령성월로 정하여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하루 빨리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 주시기를 간구한다. 이러한 위령성월의 첫날을 교회에서는 모든 성인 대축일로 시작한다. 든 성인 대축일은 일 년의 달력 안에서 기념하는 모든 성인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다시 한 번 축하하고 기리자는 날이 아니다. 마치 한 편의 성공한 연극에서 배우들이 관객들로부터 여러 번 박수갈채를 받고 난 뒤, 무대, 조명, 안무, 음악 등의 연출자들과 모두가 함께 앞으로 나와 마지막 박수를 받는 그런 것과는 다르다.

교회는 위령성월을 통해 인간의 삶이란 현세와 함께 저승의 삶도 포함되어 있음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첫날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시작한다. 이승의 삶이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올바를 때 아름다운 저승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비단 종교인들만의 심성은 아닐 듯싶다. 그래서 이 축일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우리 신자 공동체가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본받고 그 덕을 닦으며 생활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 신경에서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한다. 통공(通功)이란 말 그대로 쌓은 공로를 서로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이는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데에 근거를 두고 서로간의 연대감과 일치감을 나누기 위한 것이다. 이는 레지오 교본 내용 중 핵심 원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9장 레지오 단원과 그리스도 신비체, 84-95). 그리고 나그네 여정에 있는 지상의 교회와, 단련 중인 연옥 교회, 그리고 기쁨과 개선 중에 있는 천상의 교회라는 세 교회가 유기적인 몸처럼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는 신비스런 교회 공동체로서 각각 서로 도와주고 기도하며 이끌어 준다는 확신을 토로하고 있는 신앙고백이다.

이처럼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통해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가능해지는 것이며, 산 자와 죽은 자의 통교가 이루어진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도 사람들이 사랑으로 서로 돕는 것을 즐거워하시기에 서로 간에 쌓은 공로를 나눌 수 있도록 섭리하시어 죄 많은 우리의 기도와 성인들의 기도를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통공은 우리가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대신 기도하고 속죄함으로써 그들의 죄벌을 용서받게 된다고 믿는다. 이미 육체를 벗어난 영혼들은 육신으로 더 이상 아무런 덕행도 쌓지 못하고 다만 연옥에서 되도록 빨리 벗어날 희망만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영혼들을 대신하여 우리가 기도와 속죄행위를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며, 이는 구약시대부터 있어왔던 관습이었다. 레지오 교본에서도 위령성월에 세상을 떠난 레지오 단원들의 영혼을 위해 연미사와 기도를 하라고 되어 있다(교본 제17. 160-161).

우리가 성인으로 공경하는 분들 중에는 우리가 알고 있고 또 각자의 축일을 정해 기념하는 분들 외에도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성인들이 계시다. 한국에는 103위 순교성인들뿐 아니라 124위 순교자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명단도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공적으로 기억 할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이 더 많다. 오늘의 축일은 교회가 공적으로 기억하는 성인들 이외에도 축일 표에 기록되지 않은 무수한 무명의 성인성녀들을 함께 기억하는 날이다.

모든 성인들이란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거나 준비 중인 이승을 떠난 저 세상 사람들을 말한다. 교회의 축일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 이름 없이 조용히 가버린 사람들, 그 어떠한 화려한 기적 이야기도, 또 역사책에도 기록될 것도 없는 그저 오직 하느님만 알았던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의 책에 기록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런 이들은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요한의 묵시록은 이마에 도장을 받은 자들이며 어린양의 피로 빨아 입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들이요,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다(묵시 7,3-4.13). 그리고 장차 이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7,17) 사람들이다.

성인들은 자기 시대의 환경을 부정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이겨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자신들의 짧은 나그네 인생 동안 그리스도의 생활을 본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래서 묵시록은 박해와 환난 중에 있는 신자 공동체에게 하느님께 끝까지 충실하도록 격려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분들을 본받아야 할 그리스도 신자들은 현세를 도피할 것이 아니라 현세의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내고 극복하면서 나아야 할 것이고, 그러한 삶을 잘 이루어내도록 그분들도 우리들의 삶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시는 것이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거룩하게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만 그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하느님께서도 그를 사람들 중에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여, 한번은 수호천사를 불러 그에게 모습을 보이고 소원을 하나 꼭 들어주도록 시켰다.

하느님의 명을 받은 수호천사가 그에게 모습을 보이고 소원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런데 그는 소원이 없다고 했다. “글쎄 소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그는 한사코 소원이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천사가 너에게 사람의 병을 치유하는 기적의 은사를 줄까?” 하자, 그는 병자를 치유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면 거절했다. 그러자 천사가 죄인들을 회개시켜 바른 삶을 살도록 하는 힘을 줄까?” 하고 묻자, 그런 일이라면 당신들 천사들이 해야 할 일이라며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천사가 그러면 너의 거룩한 삶을 사람들이 모범으로 삼아 존경할 수 있도록 해 줄까?” 하고 묻자, 그는 펄쩍 뛰면서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교만해져서 사람들에게 오히려 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는 꼭 들어주어야 한다는 명을 받은 천사가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난처해하자,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저를 통해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해 주시되, 그 사실을 내가 모르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천사는 하느님께 가서 그대로 고하였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천사를 시켜 그 착한 사람에게 후광(後光)을 걸어 주도록 했었고, 이것이 성인들의 후광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은 다 볼 수 있는데, 자신만 볼 수 없는 후광의 성격이다. 살아 있는 우리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후광을 빛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들은 바로 참된 행복의 길 중에서 하나의 길을 택하여 꿋꿋이 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전례 복음은 행복한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인지 전해주고 있다(마태 5,1-12). 가난한 마음, 깨끗한 마음, 자비롭고 온유한 마음, 의를 사랑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삶은 푸른 하늘처럼 맑아 보이고 별빛처럼 빛나 보인다. 이들이야말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사는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은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느님께 끝까지 충실한 사람이며, 하느님 밖에는 온전히 의탁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성경에서 가난한 사람들이란 하느님을 행복의 근원으로 보고 삶에서 도움을 그 분 밖에는 청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물론 부유한 사람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표현을 썼다. 가난한 사람이 그 자체로 행복하다기보다는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이 담긴 마음이 구석구석에 다 들어간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이며, 세상에는 이런 곳과 이런 가정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의외로 행복하다는 것과 만족스럽다는 것을 혼동하는 경향이 많다. 우리가 알다시피 행복은 매우 영적이며 진정한 인간적인 성취를 말하지만 만족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감각과 물질적인 성취나 소유와 관련이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입으로는 정신적 행복을 찾는다면서도 실제로는 현실적인 만족을 추구하고 있기에, 이 행복선언 안에 담긴 가치들이 우리에게 걸맞지 않거나 가소롭게 생각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도 이러한 복음을 전하는 사제들의 모습에서는 종교적 위선을 확인하는 것만 같아 오히려 가증스럽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세상이 험악해져 가는 느낌이 드는 것은 대다수의 착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착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지만, 단지 그들의 목소리가 좀 더 커졌으면 하는 바람과 소망이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울며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기 보다는 울며 슬퍼하더라도 하느님의 위로를 받기에 행복하다.”고 보아야 하겠다. 예수님은 분명 자신의 위로만을 찾는 자기 연민에 가득 찬 사람을 생각하며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는 슬픈 일이 참으로 많건만 마음이 무뎌질 대로 무뎌져서 이러한 일들을 보고도 슬퍼하지 못함이 오히려 불행하지 않을까 한다.

본당 사목을 하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게 된다. 그렇게 살면서 명절을 맞거나, 밖이 몹시 춥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절실하게 그리워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냥 얼굴만 보고 가도 반가울 따름이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이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것 같다. 이들은 아마도 빈손으로 찾아오기가 어려웠나 보다. 본당 사제관 방에는 낯익은 사람들이 두고 간 빵이며, 과일이랑 떡이며 유명 메이커 옷이며 그들에게 줄 것이 너무도 많은데, 또 사제에게는 봉투나 화환 같은 것이 오히려 불편하다는 사실을 그 사람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에게 그런 것들을 받으면 더욱 불편하다. 갚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남을 돕는 성직자라는 사람이 남들에게 폐만 끼치고 다니는 것 같아서 언제나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제게 베풀어주신 배려로 인해 위에 계신 분의 보상을 받으리라 믿으시니 조금은 마음이 놓이기도 하다. 이름과 얼굴 내세우려는 사람들보다는 가진 것 없어도 정직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천직이라 여기며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에도 충실하게 일하시는 얼굴 없는 분들이 정말 높게만 보이고 자꾸 그리워지는 까닭은 아마도 하느님이 보시기에도 사랑스러울 자녀들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오늘 두 번째 독서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극진하셔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전한다(1요한 3,1). 그리고 이 사랑으로써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덕행의 생활을 할 수 있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 준비를 할 수 있다고 전하고 있다. 딸랑 세례만 받았을 뿐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2. 위령의 날 첫째 미사 전례

 

해마다 위령의 날이 되면 용인이나 용산의 성직자 묘역에 미사를 드리러 갔다. 미사 전후에는 선종하신 신부님들의 묘소를 둘러보며, 잠깐씩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바오로 사도께서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고 한 말씀을 기억한다. “달릴 길을 다 달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 가운데 참된 평화를 누리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 어린 나이에도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만 주시는 주님의 영원한 평화를 느껴본다.

올해의 축일표도 어김없이 11월이면 묘지를 찾아가라. 그리고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해주어라.”고 일러준다. 죽음은 내버려두더라도 생각보다 빨리 문을 두드린다. 위령성월의 첫 날인 11 1일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시작한다. 이 날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우리 신자 공동체가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본받고 그 덕을 닦으며 생활하자는 것이겠다. 이런 성인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느님께 끝까지 충실했던 사람이며, 하느님 밖에는 온전히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도 참 행복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다(마태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며 살기 때문에 가진 것이 적어도 그분께서 채워 주시리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가진 것을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여기며 모든 일에 감사드릴 줄 안다. 우리의 처지를 주님께 맡겨 드리며 매사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행복은 선물로 주어진다. 인간의 삶이란 현세와 함께 저승의 삶도 포함되어 있어서 이승의 삶이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올바를 때 아름다운 저승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비단 종교인들만의 심성은 아닐 듯싶다.

 

여유가 있는 사람일수록 죽음의 연습은 필요하다. 교구마다 차이는 있고, 예전에는 의무사항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성직자들은 유서를 교구청에 미리 써낸다. 처자가 없는 몸인지라 그 내용이 더욱 궁금하겠다. 사실 세상 남자들은 뼈 빠지게 뛰어봤자 마누라 호강시켜 주고 자식한테 돈푼이나 남겨 주겠다는 것이라면 좀 지나치지 않을까 싶다. 하루 살고 하루 죽으며, 삶 속에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고 그 죽음 속에서 숨쉬는 생명을 종교에서 구한다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제 당장 죽었어야 할 삶이 또 한번 허락 받았다는 행복한 착각에 감사해야 한다.

대자연 속에서 그 운행의 흐름에 따르는 피조물들은 피고 지며 나고 떠나는 생멸(生滅)의 때와 가야 할 때를 아는 것 같다. 다큐를 보다가 코끼리는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코끼리의 무덤 계곡이라는 곳으로 이동해서 그곳에서 죽는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 또한 대자연 속의 일부라고 여기며 이 뜻에 충실하게 사는 것 같다. 아프리카의 사파리는 모든 동물이 뒤섞여 사는 것 같지만 철저하게 자기 영역이 있다. 자신의 영역이 바로 자신의 소명인 셈이다. 꼭 그 영역에 만족 못하고 엉뚱한 영역을 탐내다가 죽게 되는 경우도 있다(도로 위에서 죽는 동물의 사체).

이처럼 대자연 안에 하느님의 뜻을 알아 그때를 알고 식별할 수 있는 피조물들은 대자연 안의 순리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면서 살아간다. 꼭 말 안 듣는 인간들만이 이 순리에 따르지 않고, 죽지 않겠다고, 더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아서 그 순리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늘 두려움을 안고 산다. 더러 자기 삶이 아닌 영역을 탐내다가 엉뚱한 곳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사례가 많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죽음을 미리 볼 수 있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우리의 선조들만 해도 자신의 묏자리를 미리 보아두기도 했으며 유언도 여유 있게 했다. 옛날 인디언들은 죽을 때가 되면 자기 육신을 묻을 산 속 돌무더기 위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면서 큰소리로 죽음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불가의 선승들에게는 열반송(涅槃頌)’이란 것이 내려온다. ‘열반송이란 깨달음을 얻고 죽음을 맞는 이들이 읊는 감사의 시다. 열반송은 미완의 과거에 대한 삶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말하는 유언과는 다르다. 열반송은 과거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유언은 들어줄 누군가가 있어야 하지만 열반송은 듣는 이가 아무도 없어도 상관이 없다.

아시시의 프란치스꼬나 십자가의 요한, 시에나의 카타리나 등 많은 성인 성녀들도 죽음을 맞으면서 시편으로 열반송을 대신했다. 예수님 또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시편 31,6),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했으며, 스테파노도 , 하늘이 열려있고 사람의 아들이 보입니다.”(사도 7,56)고 하며 숨을 거두었다고 하니 깨달음을 얻은 자들의 열반송은 가히 아름답기까지 하다.

자신의 죽음을 내다볼 줄 아는 눈을 영안(靈眼)’이라 했다. 이는 대자연의 법칙과 질서를 따르며 그 주인인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따르는 사람만이 갖출 수 있는 안목이다. 이런 이들은 죽음 역시 삶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찰한 분들이다. 이는 피어나는 꽃만이 아니라 시들어 가는 꽃 안에서도 아름다움을 볼 줄 알고 늙으신 어머님의 주름살 안에서도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눈을 말한다.

반면에 죽음 또한 자연의 일부이고 생의 한 부분이며, 바로 나의 삶 안에도 죽음이 함께 있음을 알지 못하며 무지의 고해를 헤매는 것을 무명(無明)’이라 한다. 달도 차면 기울 듯 누구나 죽음을 맞게 마련이다. 그러나 같이 맷돌을 갈며 살지라도 영안을 지닌 자는 새로운 세계와 영원한 생명에 대해 낯설지 않으며 준비가 되어 있지만, 무명에서 헤매는 자는 버려지게 된다(루카 17,34-35)는 이야기는 복음서에 늘상 나오는 주제가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죽음을 기억하고 죽음을 항상 응시하며 살아갈 때,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다. 죽음을 경시하고 외면할 때, 삶 또한 우리를 경시하고 외면한다. 요즘처럼 떼죽음을 이루는 사건이나 사고들, 하루아침에 쓰러지는 과로사, 교통사고나 암으로 죽어가는 오늘, 유언조차 남길 여유도 못 갖는 세상은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도 부럽고, 그토록 대단해 보이던 것들이 죽음 앞에서는 그 빛을 잃고 퇴색해 간다. 이 세상의 높은 지위나 권력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힘이 되지 못한다. 건강하고 자신만만하게 하느님을 흰 눈으로 쳐다보고 입을 비쭉거리던 자도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는 그 당당하던 사람도 비참한 몰골로 불안에 떨며 하느님을 찾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비록 미래의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지만, 죽음만은 우리 모두에게 확실한 것이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고 응시할 때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하게 된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며 나의 죽음을 응시할 때 나의 마음은 가난해질 수 있고, 나의 마음이 가난할 때 하루의 고달픈 삶이 소중해지며, 미웠던 아내나 남편의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이 되며, 울며 보채는 자식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나의 숨소리가 된다.

그러나 아둔한 우리는 자신의 죽음만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죽지 않고 다른 사람들만 죽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 없이 형제와 남편, 아내와 자식들을 죽인다. 그러고는 우리 자신의 죽음을 잊으려 한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잊기 위해서 향락에 젖어들고 취중에 매일을 살아가기도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나의 죽음을 부인하려 한다. 그래서 그 누구도 입 밖에 내서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죽음은 찾아온다. 그때 우리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며, 나의 시간이나 나의 생명, 그리고 나의 육신마저도 나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동안 나의 시간이나 나의 생명, 그리고 나의 육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결국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잠시 내게 맡겨주셨던 것임을 깨닫게 된다. 신앙인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평화의 시작이다. 오늘 위령의 날에 돌아가신 분들이 말없이 전해 주는 죽음의 신비에 잔잔한 마음으로 머물러 본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이란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다. 첫 번째 독서인 욥의 고백( 19,23-27)은 자신이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성실하게 살아왔던 삶의 이야기가 한낱 먼지로 끝나버리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나 보다. “,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19,23) 그래서 죽은 후라도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은 살아생전에 희망을 두었던 바로 그분이라고 이야기한다(19,26-27).

바오로 사도 또한 두 번째 독서를 통해 우리가 믿고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희망, 곧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졌으니, 이를 믿고 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희망이 결코 죽음이라 하여 우리를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로마 5,5-11).

실로 죽음에 대한 묵상은 종교적 귀의의 출발점으로, 신앙의 바탕이 되는 화두가 된다. 그러므로 위령성월을 좀더 값진 묵상의 계절로 삼을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오늘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먼저 가신 성인들의 열반송을 들으면서 성무일도의 끝기도를 바쳐보았으면 한다.

 

주님, 이 밤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