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Se. 주간회의 훈화(2020.11.25)2020-11-26 05:03
작성자 Level 9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독서와 복음 


묵시 15-16(15,1-16,21)은 하느님께서 죄인들과 로마제국의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자들을 일곱 가지 재앙으로 심판하시는 내용을 일곱 재앙일곱 대접에 대한 환시를 통해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묵시록 15장은 이어 나올 16장의 일곱 천사가 각기 대접을 쏟았을 때 일어나는 심판에 대한 찬미이다. 그래서 오늘 독서의 본문 내용(15,1-4)은 묵시록 저자 요한이 일곱 천사가 일곱 대접을 쏟기 전에 승리자들이 하늘 궁전에서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을 칭송하는 것을 보고 이 환시를 먼저 제시하고 있다. 앞서 7장에서는 일곱 나팔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하느님의 신실한 이들이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언급했듯이, 일곱 대접 재앙 전에 짐승을 무찌르고 승리한 이들이 다가오는 재앙과는 상관없이 천상 전례에서 하느님을 흠숭하며 그분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전한다.

요한은 하느님과 멀어진, 혹은 하느님에 대립하거나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이들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로마제국의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데 관여한 자들을 심판하고 목숨을 바쳐 당신을 충실히 믿고 따른 자기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신 하느님을 찬미한다. 이 승리자들의 찬가는 어린양 그리스도께서 모세를 통한 옛 파스카를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심으로써 성취하신 구원의 신비에 대한 것이다. 이들이 부르는 모세의 노래는 어린양의 피로 승리를 얻게 된 것(7,14; 12,11)을 찬양하는 어린양의 노래와 같다.

그래서 승리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비록 모세의 노래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탈출기에서 전하는 승전가(탈출 15,1-19)와는 다르다. 이 노래의 핵심은 원수들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의 주권과 위업을 높이 기리며 정의로운 구원을 완성하신 하느님만을 찬양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모든 업적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는 인류 구원이다. 우리 주 하느님께는 악인들에 대한 심판도 그분의 영원한 관심사인 인류 구원의 한 과정일 따름이다. 이 노래에는 인간의 업적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만 찬양한다.

 

 

어제 복음부터 시작되어 이번 주간 토요일 복음까지 이어지는 세상 종말의 담화(루카 21,5-36) 내용은 마르코나 마태오에도 병행해서 나온다(마르 13,5-37; 마태 24,1-36). 이 담화는 과부에 대한 두 자료(20,45-21,4: 가난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율법학자들; 가난한 과부의 헌금) 바로 다음에 나오고 수난기사(22,1-23,56)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루카는 확실히 마르코의 순서를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 따라 서술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마르코나 루카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언제, 어떻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지 제자들의 질문을 받으시고(마르 13,4; 루카 21,7) 긴 예언을 시작하신 것으로 전한다. 단지 루카는 종말의 긴박성에 대해 강조하는 마태오나 마르코와는 달리 예루살렘의 파괴에 역점을 두면서도 세상 종말이 아직 멀었음을 암시하며 지속적으로 깨어있으라는 훈계를 강조한다. 그리고 루카는 이미 여러 곳에서 세상 종말에 대비해 충실하게 깨어있으라는 훈계(12,35-48)나 예루살렘이 버림받으리라는 예언(13,34-35), 그리고 인자의 날이 갑자기 또 반드시 온다는 가르침(17,20-37),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해 우시면서 그 도시가 정복당하리라고 예언(19,41-44)을 하신 내용들을 언급했으며, 이제 수난에 대한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마태오나 마르코처럼 다시 집약적으로 긴 담화(21,5-36)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고 세상종말이 오기 전에 당신 제자들이 반드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점을 묵시문학적 필치로 가르치신다. 박해는 사도행전에 서술된 대로 초대교회의 운명이다. 그러나 종교정치 지도자들 앞에 끌려가 박해를 받는 것은 오히려 복음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눌변인 모세를 파라오 앞에서 당신의 대변자로 세우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당신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신다(사도 4,29; 18,9-10). 주님께서는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실 터이니 미리 변론을 준비하지 말하고 하신다(21,14-15). 그렇다고 해서 박해가 없지는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박해 가운데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충실한 제자에게는 죽음을 넘어선 구원을 약속하시며 그것을 희망하라고 위로하신다.

사도행전에는 초대교회의 많은 지도자들, 스테파노나 요한의 형제 야고보(사도 12,2), 바오로와 베드로의 경우도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복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을 법정에 넘겨 매질하고 감옥에 가두고 돌 던져 죽이고, 참수해 죽게 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부상을 입히고 신체적 생명을 파괴한다 해도 사후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 없듯이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죽더라도 그분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초창기 한국 순교사를 볼 때 신해박해(1791.진산사건)와 신유박해(1801)를 시작으로 공동체를 이끌던 거목들이 속속들이 쓰러져 나갔지만, 모진 박해와 통치자의 권력 앞에서 의연하고 당당하게 신앙을 증거했던 모습들을 상기해본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21,12-13)

윤지충 바오로, 주문모 신부, 정약종 바오로, 강완숙 골롬바, 이순이 누갈다 . 우리는 이들의 심문과정에서 나온 기록들을 보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증언들이 나온 것들을 확인하게 된다. 오늘 복음 말씀 그대로였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21,14-15) 이들의 육신을 죽일 수는 있었지만 죽음 이후에 이어질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확신은 박해와 죽음 앞에서 의연했던 자태가 그 이후에도 이어진 박해들에 있어서 그 후손들에게도 또 오늘날 이를 기억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생생한 모델로 역사의 생생한 흔적들로 남아있다.

문제는 시대의 징표나 신앙의 위기와 박해, 종말의 심판에 대한 말씀 앞에 선 우리가 지녀야 할 위기의식과 회개의 자세이다. 예로부터 종말에 대한 시대적 징표들은 꾸준히 있어왔다. 전쟁과 천재지변, 전염병과 기상이변(코로나19) . 그것은 어쩌면 경각심을 가져다 줄 수도 있었고 공포심을 가져다 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이단이 생겨났고 때가 되면 메시아를 자처하는 사람들과 사기꾼들을 중심으로 사이비 종교가 생겨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해 왔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대적 징표나 세상 망조의 현상들에 대한 경각심과 위기의식이다. 이권에 눈멀어 자연이 파괴되고 무고한 생명이 죽어나가며 빚어진 끔찍한 대형 참사들을 보면서 개탄만 해댈 뿐 전혀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본다. 절대로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맥없이 양보해 버리거나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잃어버리고서는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상적 현실 안에서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문화와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지나치는 가치와 생각들에 노출되어 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자기 신앙과 신념에 대한 은밀하고도 교묘한 방법으로 가랑비에 옷 젖듯이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실체가 없는 세력들이 오히려 물리적인 박해보다 더 위험할 듯싶다. 분명한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신앙의 위기와 시대의 징표에 직면하게 되면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증언할 때(21,13)라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종말에 대한 메시지나 묵시문학적 표현들은 모두 현실에서 오는 그 어떠한 어려움이나 신앙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과 인내심, 기다림에 대한 성실한 자세이다.

 

저녁 전례 때면 부르는 성무일도 찬가들이 있다. 이 중에 자주 언급되는 묵시록의 찬가는 마치 하느님이 없어 보이는 잔혹한 이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숙연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가 나타났고, 그분이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나, 우리 형제들을 무고하던 자들이 쫓겨났고, 밤낮으로 우리 하느님 앞에서 우리 형제들을 무고하던 자들이 쫓겨났도다. 우리 형제들은 어린양이 흘리신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진리의 힘으로 그 악마을 이겨냈도다.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기까지 싸웠으니, 하늘과 그 안에 사는 자들아 즐거워하라.”(묵시 12,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