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연중 제34주간 금요일(2020.11.27)2020-11-26 23:10
작성자 Level 9

본래 3개 세나뚜스 협의회(2020. 11. 27-28 대구 한티) 첫 날 시작 미사에서 하기로 예정되어 준비된 강론이었으나, 코로나 확진자가 갑자기 580여명을 넘어서면서 예정된 협의회가 잠정적으로 보류되었다. 이 강론은 이왕 준비한 내용이라 올리게 되었다.


우리는 전례의 연중시기 한 해 동안은 작년 홀수해 연중시기 한 해 동안 히브리서를 시작으로 모세오경의 첫 번째 창세기부터 다니엘서까지 읽어 나갔다. 올해 짝수해는 왕정이 수립되는 격동기를 묘사하면서 사무엘 상하권을 시작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으로 바빌론 유배를 가기까지 기록한 열왕기 상하권을 읽어 갔다. 그리고 그 시기와 함께한 예언자들의 활동,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카, 나훔, 하바쿡, 예레미야, 에제키엘 예언서까지. 그리고 신약의 사도들의 서간부터 요한묵시록까지, 구약과 신약을 오가며 발췌된 독서를 읽음으로써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성경 말씀은 누구에게나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필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그렇다고 성경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정형(定形)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처음이 어떤 모양이었으며, 그 마지막 또한 어떤 모양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말씀 또한 인간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그 모양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우리가 서 있는 극히 제한된 그 자리와 시간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시키며, 전체 역사의 차원으로 극대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성경말씀은 세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알파(Α), 오메가(Ω)이시기 때문이다.

 

묵시 12장부터 시작된 사탄의 세력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 오늘 독서인 20장에 이르러 그 완성을 이야기한다. 묵시 20장은 구세사를 간략하게 요약한 대목이다.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는 용을 천 년동안 결박해 두었다. 이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그분의 부활과 승천으로 사탄이 제압되었음을 가리킨다(12장 참조). 하느님께서 사탄을 잠정 기간 묶어 두시는 동안 순교자들만이 죽은 이 가운데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리게 하신다. 이들이 보여주는 증거의 삶은 이 세상의 불의함에 맞서는 의로운 행동이며, 그 행동으로 그들은 첫 번째 부활을 누릴 것이다(20,5).

사람들은 이 첫 번째 부활을 두고 현세에서 시작되는 의인들의 구원이냐, 육체적 부활이냐, 또는 영적인 두 번째 부활을 염두에 둔 표현이냐 등 해석의 논란이 많았다. 분명한 것은 부활은 하나이다. 여기서 첫 번째 부활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하느님을 증거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이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기 위한 표현이다.

또한 천 년의 시간에 대한 해석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세상이 끝나고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역사의 한 시기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1세기 말엽, 박해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바라던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 년은 메시아 예수님을 만나 새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상징적인 시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시간은 박해의 시간 속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증거하는 시간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11; 12; 13)

통상적으로 묵시록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천 년 왕국의 시대는 교회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는 현재의 상황을 말한다. 그렇다면 사탄의 활동이 억제된 현재의 상태에서 복음 전파가 완전하게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교회와 성도들의 불완전함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성취한 구원의 복음은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세상 구석구석까지 전파되어야 하는데 우리 자신의 냉담함과 무기력함이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천 년이 지나 교회의 시대가 끝나면 사탄이 감옥에서 풀려나고 사탄과 그 추종자들(‘곡과 마곡으로 상징된 하느님을 적대시하는 자들. 본문에서 생략된 20,7-8 참조)은 하느님/어린양 및 그분의 백성들과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하여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 소멸된다(20,10). 그런 다음 모든 인간은 부활하여(두 번째 부활) 마지막 심판에 직면하게 되는데, 저마다 그 행업의 책에 따라 판결을 받는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악인들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진다. 이것이 오늘 독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두 번째 죽음이다(20,14-15). 두 번째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다. 결코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정의로움에 함께하지 못하는 절대적 단절을 가리킨다. 그 단절은 결국 우리의 행실에서 오고, 그 행실이 생명의 책으로 상징화되는 어링양이 가는 길에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의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자리 잡은 천상 예루살렘에서 살게 된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 앞선 묵시 19장에서 나오는 백마 탄 기사의 승리와 20장의 종말론적 심판은 우리에게 하나의 초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탄의 속임수에 빠져 하느님을 등지지 말라는 초대이고, 사탄의 권력에 눌려, 현실을 핑계 삼아 세속의 논리를 숭배하는 나약함을 던져버리라는 초대이다. 하느님께 오롯이 돌아선 이는 세상의 논리와 현실의 핑계에서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 삶은 어린양이 보여준 나눔과 연대와 서로에 대한 희생으로 가능한 생명의 공유이다(2,7.11; 5,9; 22,2)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도래하면서 세상이 주목한 부분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매력이었다.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은 너무 평범하고 진부해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끌어낼 줄 아는 능력이 비범함이 되고, 그런 비범함이 자본과 명예로 이어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현대 미술이나 소설, 영화, 광고, 철학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서 아이디어를 쥐어 짜내고 있는 부분 또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상상력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도는 성경의 묵시문학 안에서도 이미 발견되는 부분이다. 보이는 현실 안에 녹아있는 보이지 않는 것, 그 절대자의 이름을 찾아내어 현재의 비참하고 구차한 삶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 묵시문학이 전달하고자 했던 진정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가을이 깊어가다 못해 이제 겨울의 문턱을 성큼 넘어선 느낌이다. 코로나를 겪으며 지난 봄과 여름이 간절한 기다림과 인내와 견딤의 시절이 아니었다면 결코 아름다울 수도 생산적일 수도 없는 계절이기도 하다. 치열하고 열심히 살며, 절절하게 살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날씨만큼이나 가을이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고, 이렇게 맞이하게 된 겨울은 더 추위를 두려워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임박했다는 징조로 마치 오늘의 날씨를 보고 내일의 날씨를 알 수 있듯이 무화과나무 싹과 가지를 보고 계절의 변화를 배우라는 것이다. 무화과나무의 새싹이 여름을 예고하듯이 세말은 여러 가지 조짐 가운데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것이다(루카 21,29-31). 분명한 것은 모든 날과 모든 시간이 그분의 것이고, 모든 날과 모든 시간에 그분께서 현존하신다는 점이다. 그래서 내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주권에 양도하고 온전히 승복하며 매 순간 깨어 사는 것만이 하느님과의 충만하고 영원한 사랑을 이루어 줄 현재를 사는 것이다.

모름지기 시작이 있으면 끝은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끝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모든 것이 비극적인 것만은 아니다. 무엇인가를 끝냈다고 할 때, 그 경우 끝이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일 뿐, 모든 것이 단순히 소멸되거나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성서적인 의미로 볼 때 종말이란 세상이 끝난다는 의미뿐 아니라 완성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지금까지 세상을 지탱해왔던 기존 질서와의 근본적인 단절이 이루어지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 해를 결산하면서 허영과 위선, 교만과 아집으로 점철된 죄 많은 삶을 벗어 버리고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의 부족함과 한계를, 인생의 허무함과 세상의 무상함을 하느님의 자비 앞에 펼쳐 놓고 겸손하게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삶의 확신을 지녀야 하겠다. 그저 더 이상 자신의 잘못이나 죄 때문에 번번히 제물이나 예물, 더러는 마치 거룩함을 보상해줄 듯한 것들로 때우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히브 10,11).

오늘 내가 현재를 피할 수 없듯이 미래를 또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종말 신앙은 완성될 미래를 가슴에 품고 현재 이 순간을 깨어 사는 것뿐이다. 그러나 완성될 미래는 역사의 주관자이며 완성자이신 그분의 계획에 따라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올 것이지 우리가 그 끝을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모두를 만족시키기란 불가능하며, 그것은 오만한 발상이다. 오히려 남 탓이나 해대며 딴에는 잘 만들려다가 엉망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 각자를 위해 구원 계획과 목표를 지니신 하느님 앞에 서서 지금까지 이끌어주셨고 마침내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관조하며 살 뿐이다.

그것은 마치 무화과나무를 보며 계절이 바뀌는 것을 감지하듯이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변화들에 더 민감해지며,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이 아닌 내 Ego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잘 식별하고 끊임없이 하느님을 선택하며 사는 것이다.

 

2020. 11. 27

대구 한티, 서울/광주/대구 3개 세나뚜스 협의회 미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