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제502차 월례회의 미사강론(2020.11.29)2020-11-29 17:16
작성자 Level 9

오늘은 대림 제1주일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 시기의 전례 분위기는 두 가지 성격을 띠게 됩니다. 첫째는 구세주의 탄생을 준비하고, 둘째는 세상 끝 날에 다시 오겠다고 하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전례도 1216일까지는 세상의 끝인 종말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대한 미래의 성격을, 17일부터 24일까지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구세주 탄생의 기념적인 성격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기다리며 준비하는 때이며, 기다리며 기도하는 때입니다. 교회는 기다림의 상징으로, 제대 앞에 대림환을 꾸며놓고 대림환 안에 4주간을 표시하는 4개의 대림초를 한주간씩 밝혀갑니다. 기다림에 대한 희망의 빛깔을 점점 밝혀간다는 의미로 맨 먼저 진한 자주색 초에 불을 밝히고, 다음 주는 좀더 밝은 색으로 불을 당겨가며 제일 마지막 주간은 하느님을 맞이하는 선남선녀들의 마음 빛깔처럼 하얀 색의 초에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대림초 아래의 상록수처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늘 푸르게 살아가기를 염원합니다. 이 염원이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져나가라는 의미로 4개의 대림초를 사방으로 꽃아 놓은 것입니다.

 

기다림이란 만남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기다림의 보상인 만남의 기쁨과 보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탄을 의미 있게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사람에게도, 또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도, 또 신자에게도 신자가 아니라 해도 여지없이 우리에게 찾아오듯, 준비가 안 된 누군가를 위해 기다려주거나 지연됨이 없이 그 시간은 꼭 찾아옵니다. 수험생에게 시험일이 다가오면 준비가 안 된 사람은 그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 만남을 두려워하거나 도피해 버리기도 하며 정해진 준비의 시간을 흥청망청 허비해 버리지요.

오늘 복음인 마르 13장을 비롯하여 다양하게 나타나는 성서적인 종말의 표징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암시합니다. 무화과나무의 새싹이 여름을 예고하듯(13,28-29), 여러 조짐 가운데 반드시 오게 될 종말은 우리를 하느님과 만나게 할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 정의와 심판의 하느님과 만나는 것이 종말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 만남이 주는 메시지를 앞당겨 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종말 신앙입니다. 우리 각자를 위해 구원 계획과 목표를 지니신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은 마침내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현재를 피할 수 없듯이 미래 또한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종말 신앙은 하느님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이루게 될 완성된 미래를 가슴에 품고 현재 이 순간을 깨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종말 선포는 결국 현재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살아 내라는 요청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생명과 자유, 건강과 시간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혼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종은 주인이 각자에게 권한을 부여한 것들을 수행하고, 문지기는 주인이 언제 오든 깨어 기다리라고 합니다(13,33-37).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세말의 때를 가늠하거나 계산하여 자신에게 닥칠 불행을 모면할 구실이나 기회나 찾는 어느 특정 종파의 열광적인 신심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구원계획에 따라,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원하시는 방식으로 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평소에 항구히 하느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세말의 때를 기다리는 삶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준비 없이 희망만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절한 정진으로 자신을 갈고 닦아 냉혹하고 각박한 현실과 시련을 이겨내려는 진정한 자기 실력과 수양을 닦지 않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고 희망이 없습니다. 반면에 희망 없이 준비만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은 변해 가는데 세상을 그저 자기 머리 속에 고정시켜 놓고 현실에 대한 공부 없이 준비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에게도 미래가 없고 희망이 없습니다.

현실은 참으로 냉혹하고 각박하다는 말들을 합니다. 현실은 어둠이었고 적이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학창시절 언제 학교에서 현실을 공부할 여유가 있었던가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서 번번이 현실 앞에 쓰러지고 무릎을 꿇은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사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듯이 현실을 정직하게 바로 보는 것처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현실 안에 사는 나를 정직하게 들여다본다는 것은 비참하고 비참하지만, 나와 세상을 겸허하게 있는 그대로 바로 보니, 거기에는 눈물어린 희망이 보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겸허하고 정직하게 보는 데서 희망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셔서 냉혹하고 각박한 현실을 배우셔야 했습니다. 현실을 이겨내셔야 했습니다.

 

간혹 전철 안이나 길에서 황당한 봉변을 당한 경험의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정신이 멀쩡하지 못한 사람에 의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휩쓸려 버렸는데 정작 더 화가 난 것은 그것을 태연히 지켜보며 어떤 도움도 없이 그냥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찍으며 구경만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때의 참담한 일을 겪은 것보다 세상이 참 무섭다고 했던 것을 듣습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도 그간 사라진 시민의식과 무책임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세상의 불의나 악에 대해 갖는 어떠한 연대감이나 공감능력이 떨어진 사회, 도움의 요청도 철저히 무시된 사회,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사람들이 대체로 하느님을 불신하는 이유는 세상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하느님의 무책임이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4.10.12.19.21.25.31)고 하신 하느님께서 세상의 불행과 악들을 왜 그냥 보시기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세상을 그냥 만들어 놓은 것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만 강복을 주고 세상을 질서잡고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1,28). 아울러 세상 질서와 경계를 지어놓으셨듯이 악을 허용해서는 안 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려는 연대감 또한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일 것입니다. 노상 하느님께 불만을 가진 그 사람이 평소에 그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고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지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행과 악들에 대한 하느님의 무책임과 침묵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지니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도 이러한 절망적인 탄원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이사야 예언서 63-64장은 구원을 바라는 탄원의 기도가 수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이사야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그분의 길에서 벗어나게 된 것,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하느님을 경외하지 못하게 된 것은 모두 하느님의 침묵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로부터 우리의 구원자이신데 지금은 하늘 위에 가만히 앉아 침묵하고 계신 듯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이사야 예언자는 침묵만 하고 계시는 듯 보이는 하느님께 하늘을 찢고 내려오시라고 할 정도로 절절하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당신을 경외할 줄 모르게 하십니까? ,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십시오.”(이사 63, 17-19)

 

세상은 인간의 죄로 인해 모두가 고통을 받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니 당신께서 책임져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실한 분이시기에 당신이 창조하신 이들을 고통과 파멸 속에 내버려 두실 리가 없다는 것, 그래서 이제 이사야는 세상에 대해 당신이 참으로 성실하신 분이심을 드러내달라는 간청입니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행하신 일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 선포였습니다. 이 복음은 허무한 듯한 우리의 삶 한복판에 이미 하느님께서 들어와 현존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말해 줍니다. 복음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과 사람들이 사는 땅의 현실을 만나게 해줍니다. 복잡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실망하기보다는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 신앙의 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복음에 충실하여 세상의 현실을 인정하셨을 뿐 아니라, 이 복음에 따라 천하디 천한 사람들, 당시 사람들이 외면하던 가난한 사람들, 환자들, 고통받는 사람들, 죄인들 속으로 들어가셔서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셨던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는 그리스도교는 현실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며 체험하게 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는 그리스도교는 인생을 현실에서 외딴 세계로 도피시키지 않고, 하느님 나라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 가까이 와 있음을 알리고, 현실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현실을 열심히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우리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한 시인은 이렇게 삶을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 작은 진실부터 살려 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버렸을 때는 / 작은 물길부터 살펴보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 흙과 뿌리를 보살펴 주십시오.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작은 것 속에 이미 큰 길로 나가는 빛이 있고 /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

현실 속에 생활 속에 이미 와 있는 /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

- 박노해 시인의 길 잃은 날의 지혜’ -

 

오늘 복음이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13,33)는 말씀으로 시작되었음을 상기해봅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삶을 마치 남의 삶을 살듯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바울로 사도께서도 오늘 두 번째 독서를 통해 우리가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심판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기다리라는 당부의 말씀(1코린 1,8)을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풍성한 은총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우리 가운데 튼튼히 자리 잡고 또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흠잡을 데가 많은 우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하듯이 마음이 굳어져 주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곧잘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 살아가며, 자신에게 부여된 의로운 행동과 어려운 이들에 대한 책임과 연대감은 외면합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이 이지경이 된 것에 대한 책임을 주님께만 돌리며 가만히 앉아 주님과 당신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막을 찢어 달라고 청하는 기도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시기입니다. 우리는 오시겠다는 주님의 전갈을 대림초에 첫 불을 밝히며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오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의 삶이 그저 한 생애 죽음으로 인해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우리네 세상살이에 임하시겠다는 의지의 선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 가난과 병고를 그저 무슨 희한한 구경꺼리라도 되는 양 굽어만 보시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시며, 이제 막 우리를 향해 출발하여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준비하고 기도하며 기다리라는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