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제502차 월례회의 훈화(2020.11.29)2020-11-29 17:18
작성자 Level 9

[영적 독서]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우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우선 그 첫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될 수 있는 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런 효과적인 방법이 어떤 것인지 잘 떠오르지 않을 때, 그보다 덜 효과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첫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렇게도 할 수 없는 경우, 우선 적극적인 자세만이라도 드러내야 한다. 이는 단지 기도를 바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일종의 행동을 포함한다. 이러한 행동은 비록 실제적 가치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 목적을 지향하거나 또는 그 목적에 관련된 것이라야 한다. 이처럼 마지막으로 취하는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레지오는 상징적 행동이라고 불러 왔다. 이 상징적 행동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내 불가능을 쳐부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상징적 행동은 믿음으로 무장된 우리의 정신 안으로 들어와서, 실제로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영신적인 문제와도 극적인 싸움을 펼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예리고의 성벽은 마침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39장 레지오 사도직의 주안점. 4.상징적 행동. 42923-43011)

 

 

청나라 때 학자 팽단숙(彭端淑; 1700~1780)이 쓴 백학당시문집(白鶴堂詩文集)의 잡저(雜著)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 있다(촉비이승 蜀鄙二僧).

 

() 지방의 변두리 산골에 두 스님이 있었는데, 한 스님은 가난하고 또 한 스님은 부자였다. 어느 날 가난한 스님이 부자인 스님에게 말했다. “나는 남해(南海)에 순례를 한번 다녀오려고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어떻게 가겠다는 건가?” “물통 하나, 밥공기 하나면 충분하지 뭐.” 나는 배 한 척을 사서 남해로 갈 준비를 최근 몇 년간 해오면서도 아직 그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자네는 정말 무엇을 믿고 다녀오겠다는 건가?”

 아무 말 않고 떠난 이 가난한 스님은 두 해가 지나자 정말 남해에 다녀 왔다. 그동안 옷은 해지고 행색은 초라해졌지만, 그의 얼굴에는 빛이 나고 있었다. 가난한 스님이 순례를 다녀온 이야기를 돈 많은 부자 스님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돈 많은 부자 스님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촉 지방의 변두리에서 남해는 수천 리라 부자 스님은 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가난한 스님은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리저리 미루다가 아무것도 못 한다. 굳은 의지만 있으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얘기다.

 

흔히들 불가능한 활동도 아닌데,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쉽게 한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오히려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활동을 하다 보면 난관에 부딪히기도 한다. 그럴 경우 인간적인 능력에만 의존하여 판단해 버린다면 꼭 해야 할 중요한 활동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는 사도직 활동에 있어서 불가능한 문제를 해결하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다. 이른바 상징적 행동’(Symbolic Action)이다. 이 상징적 행동이란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부딪힐 때 그 일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하느님의 은총에 의존하면서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해결해 나가는 행동이다. 마치 지붕에 올라가기 위해서 사다리를 걸쳐 놓고 한 계단씩 차근차근 올라가야 하는 것과 같고,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격언을 이행하는 레지오의 활동 방식이자 행동철학이다.

상징적 행동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의 하나가 성모님과의 일치이다. 성모님은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다. 이를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1)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성모님은 은총의 중개자요 결실의 원리이기도 하다. 예수님 또한 성모님 없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 해도 성모님의 군대로서 용기를 발휘하여 우선 시작해놓고 보아야 한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방문하여 예수님의 잉태를 전하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마리아의 질문에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고 일러준다.

유의해야 할 점은 우선 행동에 착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행동하지 않고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불가능하다고 해서 하느님께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첫 발자국을 내딛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수행하지 않는 레지오는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레지오이다. 군대가 전투에 참가하기를 거부한다면 군대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어떤 형태로든 적극적으로 활동을 수행하지 않는 쁘레시디움의 단원들이 있다면 이들은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라는 이름을 지닐 자격이 없다. 영신적 신심 행위만으로는 적극적인 활동을 수행해야 하는 레지오 단원의 의무를 채우지 못한다. 활동을 하지 않는 쁘레시디움은 강력한 사도직 실천이라는 레지오의 목적에 충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조직에 심각한 상처마저 입힌다.”(교본 제39장 레지오 사도직의 주안점. 5항 적극적으로 활동하자. 43110-20)

단원들을 위한 교육은 어디까지나 활동을 위한 것이다. 영적으로 도움이 되는 그냥 좋은 이야기만 듣자는 취지는 아니다. 레지오 단원들을 양성하는 모든 교육과 강의는 이론이나 지식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배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대개 보잘것없는 일이나 개인 접촉을 꾸준히 해야 하는 일에 몸 바치기를 꺼려하게 된다. 단원들을 교육하기 위한 강의가 실시될 때에는 모든 강의는 활동 그 자체를 바탕으로 하여 진행되어야 하며, 실제 활동과 연결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강의 제도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교본 제10장 레지오 사도직. 7항 단원 양성을 위한 도제 제도. 105-106)

 

그러나 레지오 단원의 사도적 활동이 지향이 아무리 좋아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폭력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오래 전에 TV에서 거대한 바위를 깨는 기술자에 대한 프로그램을 접한 적이 있었다. 폭약이나 기중기를 이용한 드릴 등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과 햄머를 사용했다. 그때 과연 저렇게 작은 두 개의 도구로, 보통 집보다 더 큰 바위를 깰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가지면서 보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술자들이 수십 회의 햄머질을 반복하니까, 그 큰 바위가 어느 한순간 !”하는 소리를 내면서 갈라지는 것이었다. 기술자에게 어떻게 그 바위를 쪼갤 수 있었는지에 대한 물음에 기술자들은 바위의 크기와 강도, 그리고 바위의 결을 보고,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해 한 지점을 택한 다음, 그곳을 계속 때리게 되면 쪼갤 수 있다고 했다.

가끔은 분명 옳다고 확신하는 일에도 아무것도 되는 게 없다 싶을 때면 가끔은 햄머질을 하는 그 기술자나 석공의 작업을 떠올려 본다. 백번을 내리쳤는데도 돌덩어리는 금 하나 보이지 않다가 백 한 번째 내리치는 충격으로 거대한 돌이 둘로 갈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백 한 번째 때린 것 때문에 우연히 그 돌덩어리가 쪼개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때린 횟수 하나하나가 합해져서 그 돌덩어리를 쪼갠 것이다.

물론 폭약을 매설해서 스위치 한 번 누름으로써, 혹은 기중기를 이용한 드릴 햄머로 편하게 바위를 쪼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편리함을 이용한 작업을 하지 않고 왜 그렇게 힘들게 하느냐는 질문에, 그 기술자의 답변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바위에 있는 고유한 결을 살리고, 어느 정도 좋은 형태의 것을 얻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