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Se. 주간회의(2020.12.9) 훈화(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미사전례 독서와 복음)2020-12-09 16:56
작성자 Level 9

1854128일 비오 9세 교황은 회칙 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해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선포하면서 그 동안 마리아에 대해 초세기부터 꾸준히 논란이 되어왔던 교리에 대한 종지부를 찍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신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셨다.”(DS 2803) 사람은 누구나 아담의 후예이기 때문에 원죄에 물들었고 죄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는 하느님의 예견과 특은을 통해 잉태되는 순간부터 원죄의 사함, 곧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배려 받았다는 고백이 이 교리의 가르침과 내용이다.

성경은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이 교리의 출발점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육()을 취하시고, 하느님의 성령께서 거주하시는 그 태중은 무죄하고 흠 없이 깨끗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마리아께서 그 성덕으로 말미암아 무죄하게 일생을 사셨지만,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점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된다는 구원론에 저촉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마리아의 무죄성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볼 수 있는 분위기와 대중적 신심이 확산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교리가 반포되기 직전 18301127, 성녀 카타리나 라브레(축일:1128)에게 발현하실 당시 성모님은 지구 위에 서서 두 팔을 활짝 펼친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그 주위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성모님은 이 모습대로 메달을 만들어 지니는 사람은 큰 은총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고, 그 후 메달 착용이 늘어나면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기적의 메달(Medaille miraculeuse)’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발현으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신심이 고조되었으며, 1854128일 회칙을 통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한지 4년째 되던 해, 1858211일부터 716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에서 성녀 베르나데트(축일;416,시성1933.12.8.)에게 발현하셔서 성모님은 자신을 원죄 없는 잉태된 자’(Immaculata Conceptio)라고 밝히셨다.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프랑스의 루르드에 발현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날인 2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제정하셨다. 우리가 기념하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축일은 1838121일 제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께서 교황에게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를 조선교구의 수호성인으로 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께서 1841년 이를 허락하면서부터 우리 한국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가톨릭교회는 마리아 공경을 무엇보다도 전례 안에서 드러내고 있다. 2차 바티칸공의회문헌 교회헌장 8장에서는 성모 마리아에 대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다루고 있는 성경의 전례 독서의 모범들을 제시한다. 교회헌장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전례 안에서 공경하라고 강조하고 있다(67). 이는 성모님만을 따로 떼어 기리자는 취지가 아니라 전례의 중심이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분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례 안에서 마리아 공경은 항상 강생육화에서부터 영광스러운 재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신비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2). 무엇보다도 전례 안에서 마리아 공경은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고,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이며(25). 사실 모든 그리스도교 예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드리는 예배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사적인 차원에서 성모공경에 관하여 지나친 마음의 협소함이나 거짓 과장을 피하기를 호소하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도 회칙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에서 1차적으로 전례 안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전례는 교의적 내용을 풍부하게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사목적으로도 큰 효과를 지니 만큼 다른 모든 예배의 탁월한 모범이기 때문이다(1). 말씀이 전례 안으로 들어가면 전례요소들과 화합하여 조화를 이루어서 그날의 전례가 지향하게 되는 의미를 띠게 된다. 그래서 성모축일전례에 읽게 되는 독서 말씀들은 성모님을 일방적으로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안고 있는 구세사 안에서의 메시지를 지향하게 된다. 이러한 말씀과 전례의 조화는 강론을 통해 표현된다.

 

오늘 복음의 이면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삶의 역설 하나를 말해주고 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1,37) 이름도 없는 촌구석의 처녀가 잉태하여 구세주를 낳으리라는 것도 역설이지만, 우리를 더욱 놀라게 만드는 것은 천사의 말에 따라 하느님의 그러한 구원 약속을 곧이곧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인 마리아의 순종과 믿음이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루카복음은 앞서 사제였던 즈카르야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이루시려는 구원역사를 믿지 못해서 결국 벙어리가 되어야 했던 장면을 소개한다(루카 1,5-25). 그런데 지금 오히려 이름도 없는 시골처녀 마리아가 구약성경에서는 선례(판관 13; 1사무 1)가 없었던 동정녀 잉태라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믿고 순종했던 마리아의 완전한 믿음을 보여주고자 한다(1,26-38). 구약성경을 통틀어 하느님의 모든 소명의 핵심은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1,28)였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느님께로부터 메시아를 탄생시키는 소명을 부여받은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그래서 하느님 백성 중에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들 중에서 부여된 가장 영예로우면서도 겸손한 모습 하나를 기억하게 한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하느님 백성과 하느님의 위대한 종들의 겸손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오늘 마리아에게서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된다.

오늘 전례 안에서 들려주는 첫 번째 독서인 창세기는 죄의 본질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느님의 뜻과 의지보다는 자신의 뜻과 의지를 앞세우는(창세 3,11) 데 있다고 소개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성성(聖性), 곧 거룩함이란 그 반대로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와 온전히 부합시키는 것이다. 마리아를 하느님의 모친으로 간택했다는 것은 이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은총이 자유롭고 스스로 책임을 지며, 온전히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전제한다. 은총의 수용자가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려는 완전하고도 망설임 없는 자세를 갖추었을 때만 이 은총의 수용이 가능하다.

그것은 오늘 전례의 두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뜻은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에페 1,4) 해 주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1,11-12)고 고백한다.

이러한 고도의 자유로운 결단은 인간의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인간이 처해있는 과실과 잘못들을 척결(剔抉)하면서 친히 이 자유로움을 마련하셔야 했다. 그리고 이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모친이 되는 것을 수락하는 것과 같이, 인류역사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곧 구원은 하느님을 통해 오고 그것을 수락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자유로운 수락행위가 되는 것이다.

요즘은 갈수록 믿을 만한 사람들이 오히려 뻔뻔할 정도로 거짓과 뻥이 심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우리가 믿고 뽑아주었던 사람들이 선거 때 남발했던 허황된 공약들과 구호들도 많았고, 또 그러한 것들을 다소나마 믿었기에 그들을 뽑아주었으니, 이제는 말만 잘 하면 시골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목자가 나오리라는 이야기도 있을 법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런 그들의 비전이나 이야기들을 이제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듣고도 못 들은 척, 못 들어도 들은 척, 더러는 들은 것을 다시 에둘러 새겨듣지 않으면 안 되고, 또 믿고도 안 믿었던 것처럼 기억 없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지독한 불신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마리아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믿음은, 동정녀가 구세주를 낳으리라는 것이 지독히도 비이성적이며 비과학적이라는 사람들의 비난과 조소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보다는 여기에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지성과 세상의 논리를 초월하는 역설의 하느님 앞에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굳게 믿고 수락했던 여인 하나가 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수락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감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앙의 감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 인간을 위협하는 어려움 중에 또 신앙이 흔들리는 의혹 중에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의미가 있다. 또한 이에 필요한 것들을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징표가 있으니, 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메시지, 임마누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