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제503차 월례회의 미사(2020.12.20)2020-12-20 21:07
작성자 Level 9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본당 사목을 할 때, 해마다 이맘때면 직접 구유를 만들곤 했습니다. 신학생 때부터 그 작업을 계속했던 지라 으레 방학이 되고 본당에 나오면 당연한 작업이었습니다. 제대 앞에 구유를 꾸미면서 예수님께서 머무르실 공간을 마련해 드리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사랑의 표시이고 정성이 들어가게 됩니다. 수차례 변형도 해보고, 색다른 모습으로 꾸며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고 그분이 머무실 구유를 마련하는 손길에서 혹시나 묵상은 덜하고 내 자신의 욕심이나 취향에 따라 모든 장식이나 소재들이 정해지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다윗 왕은 하느님께서 머무실 성전을 지어드리려는 마음을 먹습니다(2사무 7,2). 다윗은 사울왕에 이어 남북으로 흩어진 지파들을 통합하여 통일 왕국을 이루고 외세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 인물이었습니다. 고대 근동 이스라엘 주변국가에 있어서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왕들에게 있어서는 백성을 한데 모으기 위한 정치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사회적 안정과 왕조의 보장을 위해서 자기들이 믿고 있던 신의 축복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전을 지어드리겠다는 다윗의 계획을 예언자 나탄을 통해 공식적으로 거절하십니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2사무 7,4). 사실 오늘 독서의 내용만으로는 거절의 명확한 이유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주님의 현존이 건물과 같은 그런 것에 영원히 소속될 수 없으며, 주님의 현존은 한 장소에 국한된다는 생각을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뜻이 반영되어 있었을 것입니다(1열왕 8,27; 이사 66,1-2). 그것은 하느님을 어느 한 장소에 묶어둠으로써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축복을 소유하거나 보장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웃 나라에서 통상적으로 행해지던 정치적 활동의 한 형태이자 인간의 업적이나 성공으로 하느님의 미래에 대한 축복을 보장받으려는 사회적 상식이 빚어내는 부정적인 결과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지어서 얻으려는 평화나 영화의 시작은 기초부터 잘못되었음을 깨우쳐주십니다. 오히려 주님께 집, 성전을 지어 줄 사람은 다윗이 아니었습니다. 그 영예를 누릴 사람은 그의 아들인 솔로몬이었습니다. 성전을 짓는 것은 주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서만 진행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성공했다는 그 사실만으로 자기 주도하에 이 일을 착수할 권리까지 부여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직 주님의 백성을 돌볼 권한만을 위임받았을 뿐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다윗에게 집안을 일으켜 주시겠고, 그의 후손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2사무 7,12.14)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7,16) 다윗 왕조와 영원히 함께하시겠다는 이 약속은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지탱해 주었고,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에 의하여 왕국이 멸망한 다음에도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은 남아있었습니다. 하느님은 다윗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셨으며 하느님의 약속은 한 왕조의 붕괴로 무너지고 끝날 수 없다는 것, 여기서 메시아 희망이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에 임금이 존재하지 않게 된 때에도 이스라엘은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나탄의 예언이 온전히 실현되었다고 믿고, 유다인들은 지금도 이 약속이 유효하다고 믿기에 평화의 임금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바로 이러한 희망의 비전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는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1-33)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해주시는 희망의 비전은 다윗처럼 인간적인 성취나 업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의 은총의 자녀가 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오늘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1,28)고 하는 인사를 먼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은총을 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복음의 이면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삶의 역설 하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1,34)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1,37) 이름도 없는 촌구석의 처녀가 잉태하여 구세주를 낳으리라는 것도 역설이지만, 우리를 더욱 놀라게 만드는 것은 천사의 말에 따라 하느님의 그러한 구원 약속을 곧이곧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인 마리아의 순종과 믿음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루카 복음은 앞서 사제였던 즈카르야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이루시려는 구원역사를 믿지 못해서 결국 벙어리가 되어야 했던 장면을 소개합니다(1,5-25). 그런데 지금 오히려 이름도 없는 시골 처녀 마리아가 구약성경에서는 선례(판관 13; 1사무 1)가 없었던 동정녀 잉태라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액면 그래도 믿고 순종했던 마리아의 완전한 믿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1,26-38). 구약성경을 통틀어 하느님의 모든 소명의 핵심은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1,28)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느님께로부터 메시아를 탄생시키는 소명을 부여받은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래서 하느님 백성 중에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 중에서 부여된 가장 영예로우면서도 겸손한 모습 하나를 기억하게 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하느님 백성과 하느님의 위대한 종들의 겸손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오늘 마리아에게서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에서는 죄의 본질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느님의 뜻과 의지보다는 자신의 뜻과 의지를 앞세우는(창세 3,11) 데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거룩함이란 그 반대로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와 온전히 부합시키는 데서 시작합니다. 마리아를 구세주의 모친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이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은총이 자유롭고 스스로 책임을 지며, 온전히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은총의 수용자가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려는 완전하고도 망설임 없는 자세를 갖추었을 때만 이 은총의 수용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오늘 전례의 두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는 내용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로마서를 시작하면서도 자신의 사도직을 수행할 은총을 주신 목적이 만백성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로마 1,5). 그가 은총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도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자신의 욕구와 의지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야 할 때가 있음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6,12-13; 8,12-13; 필리 2,12-13).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그렇게 신비를 드러내신 목적은 바로 모든 민족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16,26)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마리아의 이러한 고도의 자유로운 결단은 인간의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인간이 처해있는 과실과 잘못들을 척결(剔抉)하면서 친히 이 자유로움을 마련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모친이 되는 것을 수락하는 것과 같이, 인류 역사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행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곧 구원은 하느님을 통해 오고 그것을 수락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자유로운 수락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갈수록 믿음과 신뢰를 보여주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뻔뻔할 정도로 거짓과 허풍이 심한 시대에 살아갑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우리가 믿고 뽑아주었던 사람들이 선거 때 남발했던 허황된 공약들과 구호들도 많았고, 또 그러한 것들을 다소나마 믿었기에 그들을 뽑아주었으니, 이제는 말만 잘하면 시골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목자가 나오리라는 이야기도 있을 법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그들의 비전이나 이야기들을 이제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듣고도 못 들은 척, 못 들어도 들은 척, 더러는 들은 것을 다시 에둘러 새겨듣지 않으면 안 되고, 또 믿고도 안 믿었던 것처럼 기억 없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지독한 불신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믿음은, 동정녀가 구세주를 낳으리라는 것이 지독히도 비이성적이며 비과학적이라는 사람들의 비난과 조소를 무색하게 만듭니다. 그보다는 여기에 보잘것없는 인간의 지성과 세상의 논리를 초월하는 역설의 하느님 앞에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굳게 믿고 수락했던 여인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수락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감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앙의 감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느님께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마음보다는 오히려 다윗 가문에 축복을 내려주셨던 하느님을 헤아려보면, 마리아는 또 다른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당신의 방이요 거처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따로 머무르실 물리적인 집이 필요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윗과 우리를 위해 영원히 머무를 거처와 결코 인간의 권력이나 힘으로 멸망하지 않을 나라를 일으켜 세우시고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인간을 위협하는 어려움 중에 또 신앙이 흔들리는 의혹 중에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징표가 있습니다. 또한, 이에 필요한 것들을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징표가 있으니, 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메시지, 임마누엘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