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Se.주간회의 훈화(2021.1.27)2021-01-28 06:15
작성자 Level 9

하느님의 말씀은 씨와 같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비유이다(마르 4,3-9). 사실 하느님의 말씀인 씨가 좋은 씨와 나쁜 씨의 구별이 있겠는가? 단지 그 씨가 떨어진 땅의 종류와 토양에 따라서 씨앗의 성장과 열매를 맺는 것이 다르게 제한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비유는 다른 비유와 마찬가지로 말씀을 진지하고 순수하며 솔직한 마음으로 듣는 사람에게는 그 뜻이 명백하고 직설적이며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농부가 씨앗을 뿌릴 때 그는 무슨 기대와 희망을 가질까? 그는 분명히 자신이 뿌린 씨앗이 올해에도 가뭄이나 우박과 같은 천재지변을 잘 극복하고 큰 수확을 내리리라는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있다. 물론 많은 씨앗들이 극복할 수 없는 장애에 부딪쳐 소멸하겠지만 좋은 땅에 뿌려진 대부분의 씨앗들은 엄청난 결실을 맺을 것이다. 이 씨 뿌리는 농부의 마음자세는 곧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님의 마음자세와 같다. 결국 씨앗은 교회의 복음 선포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여러 가지 서로 다른 토양은 이 말씀을 듣는 청중인 셈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비유 안에는 실패의 이유가 세 가지로 구분되어 나온다. 첫째 유형은 말씀을 받아들인 즉시 새들로 의인화된 죄악에 의해 그것을 빼앗긴 사람들을 말하며, 둘째 유형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하지만 뿌리가 갚지 않아 시련과 박해가 닥치자 항구하지 못하고 변절하는 냉담자들을 말한다. 셋째 유형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기 시작했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에 대한 애착과 그 밖의 다른 욕심 때문에 성숙한 믿음의 생활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세 가지 실패유형과는 대조적으로 맨 마지막에 성공유형이 소개 된다.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발전시켜 놀라운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한다.

초창기의 교회는 선교의 부진 앞에 쉽사리 좌절할 수도 있었던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안일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는 신도들을 일깨우기 위해 거듭거듭 이 비유를 들려주곤 했었다고 한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에 일생을 매달리셨던 예수님께서도 초창기를 제외하면 끊임없는 비판과 오해와 반대에 부딪치셨고 심지어 가까운 제자들의 배신까지도 겪으셔야 했다.

그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인격과 생각을 지닌 우리들이다. 설령 그분과 언약의 관계에 들어갔다 해서 늘 성공적인 일만 생기고 복 터지는 일만 꿈꾼다는 그래서 착각일 수가 있다. 오히려 갖가지 오해와 비판과 반대에 부딪칠 것은 뻔한 이치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실패를 두려워하고 언제나 성공을 보장받고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다 그러하듯이 열매를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수많은 실패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어려움들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쉽게 좌절하려는 우리에게 오늘도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신다.

그럼에도 오늘 복음의 내용은 다소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삽입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셨던(4,12)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이사 6,9-10)

 

예수님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혼자 계실 때 열두 제자와 다른 추종자들이 예수께 모여와 비유의 뜻을 물었을 때 하신 말씀이다(4,10-11). 어쩌면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진지한 노력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단순한 정보나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신비는 삶 전체를 가지고 뛰어들어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를 한번 듣고 떠나버린 다른 사람들은비유의 깊은 메시지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없는 사람들이었다(4,11). 이들과는 달리 나중에 당신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이 비유의 말씀을 새겨듣고 그 교훈을 더 배우고자 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교만하고 건방지며 독선적이고 천박한 이들에게는 귓전으로 흘려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듣기는 들었으나 귀담아 들은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숨기고 몇몇 사람들에게만, 비밀로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청중이 경청하려는 마음보다는 하느님께 마음을 닫아버리고 진리를 외면한 까닭에 주님의 말씀이 전해주는 진의를 못 알아들은 것이다.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4,9)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시지 않는다. 비유의 메시지는 한번 듣고 그 내용을 머리에 담아두기만 하면 되는 지식이 아니라 그것을 더욱 깊이 명상하고 일상생활 안에서 구체화 시켜야 한다는 것이겠다. 결국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단순히 지식을 얻음으로써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투신해야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임을 천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