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제504차 월례회의 미사(2021.1.31)2021-01-31 15:00
작성자 Level 9

오늘은 연중 제4주일입니다.

 

 

지난 주 복음을 통해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고, 그물을 손질하며 일상생활을 하던 어부 네 사람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지체없이 그분을 따라 나섰다고 했습니다(1,16-20). 그들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로서 시몬과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이들이 고기를 잡는 배와 그물은 버렸지만 예수님과 함께 사람을 낚는 배에 올랐습니다. 이 배의 이름은 복음선포 호()’이며, 선장은 예수님이시고, 제자들은 선원들이며,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복음선포의 항해(航海)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번 주 전례는 그 항해의 첫 하루 일과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운 복음선포 호가 카파르나움에 도착했고,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첫 제자들과 함께 카파르나움에서 보낸 복음선포의 첫 하루를 일컬어 예수님의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마르 1,21-39) 라고 합니다. 이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 일정, 그것도 안식일에 그 많은 일들을 수행했다는 점이 다소 과장됐다는 생각도 들지만, 예수님의 첫 활동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안에 마르코 복음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공생활 활약상을 집약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곧 예수님 생애가 하루로 요약된 것인 셈입니다.

안식일에 먼저 회당을 찾아가신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회당에 있던 악령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1,21-28). 회당(會堂, Synagogue)은 일정 지역에 사는 유다인 공동체가 하느님을 예배하는 공적 모임의 장소입니다. 이 모임의 관리 책임자는 회당장이고, 주요 역할을 맡은 이는 율법학자입니다. “율법학자 에즈라”(느헤 8,1.4; 12,26)영적 후예임을 자부하던 율법학자들 대부분은 바리사이파에 속했고, 그들은 유다인 삶의 준칙인 모세의 율법을 현실 상황에서 어떻게 준수해야 할 것인지 판단하고 가르치면서, 민중에게 존경과 남다른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에게 무척 중요하고 거룩한 날, 중요하고 거룩한 장소에서 처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먼저 가르치시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첫 이야기에서 먼저 부각되는 것은 가르침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과 그들이 받은 충격입니다. 가르치시는 그분의 권위가 율법학자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권위는 기껏 권위 있다는 다른 유명한 율법학자들의 견해, 지식 등 외부의 권위에 기초하여 자기 진술의 권위를 세웠겠지만, 예수님은 외부의 다른 근거에 기대지 않고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의 뜻과 마음을 올바로 밝히시는 말씀에 힘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권위를 능가하는 새로운 권위가 대두되면서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의아스럽고 놀라게 만드는 점은 하느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모임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1,23). 복음서에 나오는 더러운 영’(‘악령’, ‘사탄’)은 거룩하고 정결하신 하느님의 본성을 적대시하는 입장을 취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은 자기들 사이에 더러운 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지니신 밝은 빛만이 어둠의 존재인 더러운 영을 드러냈습니다. 더러운 영이란 본시 감추어지고 숨겨져서 은밀히 활동하던 것인데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존재가 드러났으니 두려움에 싸여 격렬한 반응을 보입니다. 원래 겁먹은 개들이 짖어댄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존재가 밝혀지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자기는 예수님의 신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을 안다고 허세를 부립니다(1,24).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에게 당신의 정체를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십니다(1,25). 왜냐하면 이 신원에 대한 정체는 메시아의 비밀로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서만 온전히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뜻을 다 이루시기 전에는,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말씀하시기 전에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1,25)고 하시며 당신의 말씀으로 더러운 영을 분리시키십니다. 마치 창조 때 혼돈으로부터 세상을 조성하시고 질서를 잡으실 때, ‘어둠처럼 서로 상대되는 것들을 분리시키시며 질서를 잡아 나가시는 명령과 같습니다(창세 1,2-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더러운 영과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분리하시면서 당신의 직무와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번째 공적 활동을 통해 복음 선포의 지향을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인간의 세상에서 거짓과 불의와 폭력에 기초한 더러운 영의 지배가 끝장나고 사람이 자유로워지는 하느님 나라, 창조된 본래의 생명을 죽음과 죄악의 세력에서 살려내어 새롭게 하는 복음의 실체가 예수님을 통해 처음으로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더러운 영을 무슨 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마귀들린 사람의 현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상영되었던 엑소시스트’(Exosist)라는 영화가 많은 관객을 불러 모은 일이 있었고 그것이 흥행에 성공하자 그와 비슷한 영화 시리즈들이 연속적으로 쏟아져 나왔으며, 국내에서도 그런 종류의 영화들이 상영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그와 같이 눈에 보이는 조잡한 형태의 유령이나 귀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 그리고 우리 세계의 근저에 뿌리를 박고 있는 숨은 악입니다. 이러한 악의 세력은 조용히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우리의 일상생활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자기만, 자기 가족만, 자기 집단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기주의나 다른 사람에 대한 질투와 증오심, 다른 사람을 짓밟으면서까지 자기의 지위와 이해관계를 성취시키려는 욕심과 아집으로 작용하며 이는 사회적으로도 조작이 가능한 급기야 무서운 결과이자 재난으로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능률과 성공이 가치의 기준이 되어 지배하며, 민첩하고 외모가 단정한 사람은 인정받고 동작이 굼뜨고 머리회전이 느린 사람은 짓밟히게 되는 세상, 자신의 외형을 뜯어고쳐서라도 인정받고 싶어하는 외모지상주의에 따른 세속적 가치관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나면서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사회의 공기처럼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하나의 어두운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력이 사회의 구조나 인간의 사고에 작용을 하여 하느님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가는 건강한 삶에 저항을 하는 것입니다.

현대 세계와 사회, 심지어 신앙 공동체와 개인 안에서조차 볼 수 있는 온갖 폭력과 소외, 분열과 탐욕, 불신과 경쟁에서 인간을 망가뜨리는 더러운 영의 힘을 과연 사람들이 감지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감지했다 하더라도 인간의 힘으로는 속수무책 무기력감을 느낍니다. 이미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아무 역할도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야 비로소 인간은 온전하게 자유를 회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악령조차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명령에 복종하긴 했지만, 이는 믿음에서 오는 순종이 아니라 두려움의 복종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순종은 빛과 진리이신 예수께 나아가는 것이며,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몸담고 있는 신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과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은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강제된 흐름에 뒤죽박죽 혼돈의 상태로 신자들은 적당히 양다리를 걸치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과 정치적 관점으로 복음과 교회까지도 바꿔놓으려 합니다. 사람들은 거룩함을 빙자한 모임 속에 더러운 영에 짓눌려 살면서도 그 영향력을 알지 못합니다.

복음에서는 더러운 악령이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고 훼방꾼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악령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으려 합니다. 회당에도 더러운 영이 활동하고 있듯이 교회 안에도 이런 세력들이 있습니다. 복음에 디아볼로스(διαβολος)’라고 하는 이 영의 실체는 본래 이간질하는 자’ ‘분열을 꾀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이탈시키게 하는 자이며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이들은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본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머리로는 기가 막히게 하느님을 알고 있지만 계명을 전혀 실천하지 않고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면서도 말로만 신앙인인 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제법 신앙과 사목에 대해 무척 잘 아는 체하며 사목자들을 가르치려거나 훼방자로 등장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복음에서 주님께서 악령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고 싶습니다. 입 닥치라고. 왕년에 그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고, 또 그가 과거에 대단한 신앙적인 체험을 했으며, 어떤 성취감을 느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가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다 해도,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자신이 복음적인지 또 자신이 얼마나 복음에 충실한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는 주님의 참된 예언자의 말은 잘 들어야 한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신명 18,15.19).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이들은 주님께서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신 사람으로서(18,15.18) ‘호렙 산 집회의 날에 세워진 유일한 직무이기 때문입니다(18,16).

그런데 오늘 독서 말미에 다소 끔찍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18,20) 사실 이 말씀은 오늘 독서 신명기의 본문이 나오기 바로 앞서 나온 내용을 반복하는 내용입니다. 하느님 백성이 주님께서 주시는 땅에 들어가면 가나안 이방 풍습을 따라 점쟁이나 복술가, 요술사와 주술사 주문을 외는 이와 죽은 이의 혼백을 불러 물어보는 이 등에게 문의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18,10-11)를 내리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가장 약한 마음인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자극하여 돈벌이를 한다는 점에서 악한 특성을 지닙니다. 돈 몇 푼 주고 자신의 불안한 미래의 인생을 맡기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래서 참된 예언자는 미래의 불안에서 오는 사람들의 기호에 편승한 점쟁이나 주술사와 같은 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입에 담아주는 하느님의 말씀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말에 목숨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18,19-20). “예언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서 하느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2베드 1,21) 사람들은 그의 말과 세상을 보고 그가 참된 예언자인지 식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8,21-22).

우리가 가진 감각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향하게 합니다.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려고 하는지에 따라 우리 인생의 가치와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께서도 두 번째 독서를 통해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굴레를 씌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7,35)고 전합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를 읽고 나서 올린 화답송을 기억하시는지요. 시편 저자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입에 올린 화답송은 참된 신앙인이 향해야 할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으로서 중요한 영적 감각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에서 회당에 모인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반응(마르 1,28)을 보인 것도, 그들이 듣고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오늘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 95,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