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Se.협의회 훈화(2021.2.3)2021-02-03 20:42
작성자 Level 9

연중 제4주간 수요일 복음(마르 6,1-6)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핵심은 인간구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다보니 각 종파마다 인간구원을 위한 가르침이 담겨있는 경전의 내용도 비슷한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불교 선종의 큰스님이었던 마조 조사가 잠시 고향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이때 고향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옛날 바로 이웃에 살던 한 노파가 와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무슨 대단한 양반이라도 와서 이렇게 소동이 났나 했더니 바로 쓰레기 청소부 마씨의 아들 녀석이 왔구먼!” 이 소리를 듣고 마조 조사는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지었다고 한다.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에는 가지 마소. 고향에서는 누구도 성자일 수 없고 거기서는 진리를 가르칠 수 없으니, 개울가에 살던 그 할머니, 아직도 내 옛 이름만 부르네!”(마조선사, 709-788)

 

그림과 사람은 멀리 놓고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너무 가까우면 그 사람의 가치를 알아보고 인정해주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오늘 복음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른 곳에서 성공하고 고향인 나자렛으로 돌아오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고향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준다(마르 6,1-6).이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면서 자라온 것을 보았으니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알고 있노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한 동네에서 자란 청년 예수의 성공을 빌어주지 못했던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에서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부족했던 점을 성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고향 사람들은 그분이 가르친 내용보다, 그분이 어디서그런 지혜와 능력을 얻었는지 더 궁금해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6,3)고 했다. 남이 잘되기 바라는 마음 씀씀이가 부족하고 더 나아가 남을 쉽게 헐뜯는 모습을 어느 정도 지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아닐까 싶다.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것과 관련해서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어떤 이는 배가 고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배가 아픈 것은 못 참는다라고 하는 이도 있다. 자신의 비열함과 더러움은 못 보면서 남을 외관이나 출신배경으로만 보는 얄팍한 근성, 누가 잘 되면 , 걔 옛날에 내 밑에 있었어!”라는 말을 꺼내서라도 구태여 스스로를 내세우며 그를 깎아 내리려는 심보가 아닐까 한다.

 

어떤 사람에 대해 평가를 할 때 함께 살아봐야 알지!”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가까이 지켜보고 실제로 겪어봐야 안다는 것일 게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그 사람을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은 것이다. 멀리서 보는 사람에게는 사목자가 훌륭하게만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만은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비틀어진 성격의 소유자일까? 그 아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그 사목자가 거창하게 외쳐대는 복음설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두렵다. 함께 일하는 수도자나 보좌신부는 내가 상전의 히스테리나 맞춰주고 살기 위해 출가했는가?”라고 자문할텐데 그 참담함으로 받은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제대 위에서 미사를 드리고 강론할 때야 거룩하게 보이지 않을 사제가 어디에 있을까? 저서나 매스컴으로 대할 때야 훌륭하게 보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도 일종의 매이크 업이다. 메이크 업에는 인간성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한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이 그의 인간성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성당 종지기나 관리인, 사무장, 사무원, 식복사 그리고 수도자나 함께 사는 신부들, 그들의 눈이 바로 그의 인간성을 찍어주는 카메라이다. 어쩌면 사목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복음화 될 일차적인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을 배척하고 욕하기는 쉬워도, 또 사생활을 들춰내고 미워하며 조소를 보내기는 쉬워도, 과연 오늘 복음이 그러한 점만을 묵상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사람은 자신과 가까운 관계의 소중함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좋은 것은 꼭 나와는 차이가 나고, 멀리 가야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중국의 고전 십팔사략(十八史略)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당나라 말기의 재상이었던 이덕유(李德裕)란 분이 있어서 황제에게 이렇게 간한 적이 있었다. “마음이 곧은 사람은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을 보고 비뚤어져 있다고 말을 하는데,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마음이 곧은 사람을 보고도 비뚤어져 있다고 말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가 사실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바로 그 사람의 인격에 의해 결정되어질 수 있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것을 인식해 나가는 데 있어서 1차 인식의 단계와 2차 인식의 단계란 것이 있다. 1차 인식에서 생긴 편견이나 잘못된 정보들이 2차 인식을 통해 정화되고 여과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러 준다.

 

창문과 거울의 차이점은, 창문을 보면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이 보이는데 거울은 자기 모습만 보인다. 그 이유는 뒤에 덕지덕지 칠해 놓은 검은 수은 때문이다.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덕지덕지 칠해 놓은 선입견과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이다. 마치 자신은 사람에 대해 대단히 잘 아는 양, 젊은이는 어려운 일을 못 해내리라는 편견, 세상은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치부해 버린다. 설상가상으로 하느님께서 보여주실 그 사람 안에 담겨 있는 무한한 잠재력과 미래 가능성마저 닫아 버려 그 사회는 변화가 없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못하는 사회라면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 와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랑과 진리를 찾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선입견과 편견으로 만들어진 고정관념의 세상이다. 이것이 너무 익숙해지면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는지조차도 모르며, 도무지 회심이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것을 가리켜 한마디로 불신이라고 하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몇몇 사람을 치유해 주신 것 외에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마르 6,5)고 표현하고 있다. 믿음은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참여하고 싶은 지향과 의지를 드러내는 통로이다. 하느님께 마음을 열지 않는 불신 상태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느님의 구원행위는 당연히 한정될 수밖에 없다. 복음 처음에는 사람들이 놀랐지만 말미에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6.6)고 전하고 있다. 복음은 이리 된 그 근본적인 원인을 한마디로 불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은 이들을 설득하려고 더 머무르거나 좀 더 놀라운 일을 보이지 않으시고, 당신의 길을 떠나신다(6,6.11). 당신을 배척하는 이들에게 걸려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으시고, 그분은 들으려고 하는 누구에게나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활동을 계속하신다. 당시 그분을 배척한 고향 사람들은 나자렛 사람들이고 유다인이었지만, 오늘날 그분을 너무 잘 알아 형제자매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속칭 교우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실제로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아니면 자기들이 설정해 놓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외에는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유리하고 좋은 것만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언제나 종교를 하나의 인간적인 투자로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하느님과 협상하려고 한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거부하고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는 경우까지 생기게 된다.

옛말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이 있다. 군중의 마음가짐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는 신앙을 자기 편리한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들이 보기 좋거나 듣기 좋은 것만을 받아들이려 하고 혹시라도 자신들에게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은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에는 개인적인 고집과 욕심으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다.

 

간혹 신자들이 나자렛 사람들처럼 사목자의 인간적인 면에만 관심을 갖고 인간적인 면만을 바라보는 수준에 머문다면 그 공동체는 끝없이 시끄럽고 갈등 속에 휩싸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제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나이도 젊은 놈이하며 함부로 대하려고 한다면 더 이상 말 다 했다고 본다. 그런데 힘들고 시끄러운 본당일수록 그런 신자들이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에 사목자가 상처를 받고 마음 약한 신자들은 이에 혼란스러워 한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처한 공동체는 하느님의 일로 파견받은 하느님의 사람을 하나의 인간으로밖에 보려고 하지 않는 낮은 신심의 소유자들이 이끌어가는 공동체이다. 오늘 복음처럼 하느님의 사람을 인간의 모습으로만 보려고 하는 곳에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6,5).

이에 반해 사목자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남기를 끊임없이 함께 노력하고 걱정해주며 기도하는 공동체는 절대 시끄럽지 않다. 바오로 사도가 남긴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 2,13)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은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0-41; 마르 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