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대전 Re. 순방(2021.2.7)2021-02-08 06:12
작성자 Level 9

대전 Re. 순방 훈화

 

 

순교자의 땅에 순방을 허락해주신 대전교구 교구장님과 Re.단장님 이하 평의회 간부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이 어려운 시기에도 좋은 레지오의 좋은 표양을 보여주시는 점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연중 제5주일 전례를 맞이했습니다. 선정된 복음(마르 1,29-34)은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 들러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님을 고쳐주셨고, 해가 저물어 문밖에 모여든 수많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자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 레지오 단원으로서 몇 가지 점을 성찰해보기 위해 훈화를 준비해왔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어떤 장면에 이르러 다음 구절로 넘어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많은 생각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시몬이 누구이겠습니까? 이미 결혼을 하여 처자식과 장모까지 변변찮은 어부의 직업으로 먹여 살려야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다가 웬 낯선 사람의 나를 따라오너라”(1,17)는 말에 즉각 모든 것을 버리고 사라졌으니, 장모의 마음을 누가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은 화병(火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1)고 했습니다.

분노의 대상이 봉사의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손길로 분함이 눈 녹듯이 사그라져 열이 식었고 화병이 사라져 사위를 꼬드겨 가출하게 한 불한당손님으로 접대하게 되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한결같이 그저 열이 내린 시몬의 장모가 일어나 시중을 들게 되었다라고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시몬의 장모 또한 부르시니 따랐다고 한 사위 시몬이나 그의 동생 안드레아처럼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몰려드는 사람들을 모두고쳐주시지 않고, 다만 많은사람들을 고쳐주셨다(1,34)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의 욕심이야 아쉬운 사람들 모두 고쳐주셨으면 하겠지만, 마치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요구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또는 자동적으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오직 자기네 현실적인 아쉬움 때문에 찾는 이들에게는 한계점을 제시하는 듯합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사도직 활동에 대해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아쉬움을 채워주는 그릇된 환상과 억측의 가능성을 없애고자 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대한 곡해의 대부분은 기적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아쉬움에 목마른 자신들은 다만 예수님의 기적이나 얻어 누리면 그만이라는 편리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기적의 올바른 의미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결과에서 오는 사람들의 중대한 오해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6-27)

예수님의 기적은 인간 고통과 한계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구체적인 표시입니다. 평소에는 신앙에 관심조차 없던 이들이 기적에 운을 걸어보려는 기회주의적이고 임기응변식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우리의 아쉬움을 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욕심과 지향들이 하느님의 뜻에 얼마나 순수하게 부합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들이 정화되고 여과되는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도외시한 채 자신의 병이나 고치기 위해 또 자신의 고통이나 덜어보기 위해 하느님을 찾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고통은 없앨 수 있는 것도, 또한 결코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하나의 고통이 지나갔는가 싶으면 또 다른 고통이 다가옵니다. 슬프게도 고통은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이지, 해결하느냐 해결하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없애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 고통을 없애기 위해 찾아왔다면 잘못 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자신의 고통이나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그런 허약한 집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어지고 함께 고통을 이겨내고 극복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연대성을 통해 이겨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1,37)라는 사람들의 요청에도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1,38)라고 단호히 그 요청을 물리치십니다. 어떤 곳에서의 성공과 성취에 도취되어 머물러 있지 않고 과감하게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시라고 하신 말씀에서 출가(出家)한 이들이 또 다른 안락함과 편리함에 머물러 안주하고 싶어하는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진정한 출가인들은 세속적인 명예나 지위에 연연해하지 말고 내적으로 자유로워야 합니다. 어느 종교집단에서 어떤 자리에 연연하거나 그 자리를 두고 다투는 사람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발심 출가한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중 벼슬 닭 벼슬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출가인으로서의 본분에는 관심이 없고, 세속적 권모술수나 일삼으며 자기들은 특별한 대우나 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그 종교기관에 관여하고 있는 한, 그 집단은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문제는 그에게 출가정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해 부모형제와 살던 집을 등지고 떠났는지, 처음 집을 나올 때의 그 원점으로 돌아가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나쁜 것이란 가장 좋은 것이 타락한 경우입니다. 출가한 이가 제 분수를 망각한 채 독선과 아집으로 하느님의 뜻과의 일치와 조화를 모르는 그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출가를 빙자한 추한 모습만 확인하게 됩니다.

너무도 간결하게 묘사된 오늘 복음 안에는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점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네 삶에서 오는 고통과 함께하고자 하시려는 소신과 의지를 느낍니다. 우리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형제들의 고통과 함께하는 연대와 나눔을 통해 이 세상의 끔찍한 고통을 이겨나가려 할 때, 우리 주위에서 불치병과 장애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사람들이 왜 그러한 일을 하는지 이제는 올바른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할 때 오늘 두 번째 독서인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 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