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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Se.직속 Co. 소속 Cu. 단장 연수 강의(2021.2.21)2021-02-22 04:25
작성자 Level 9

레지오 단원, 특히 Cu.단장으로서의 영적 소양

2021. 2. 21

이동훈 시몬 신부

Se.지도신부

 

 

1) Cu.단장의 중요성

 

교본 제282항에 꾸리아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이 나온다. 코로나가 지속되고 교회의 모임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꾸리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꾸리아는 비록 평의회에서 제일 아래에 있는 평의회이긴 하지만 레지오의 기간(基幹)이 되는 평의회로서 중요한 관리 기관이기 때문이다. 교본에서도 레지오의 운명은 꾸리아의 손에 달려 있으며, 그 미래는 꾸리아의 발전 여하에 달려 있다.”(교본 제2824624-25)고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꾸리아가 평의회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꾸리아 전체, 특히 간부들에게 높은 수준의 정신적 용기가 명백히 요구된다.”(같은 쪽 21-22)

이를테면 꾸리아는 인간 신체에 빗댄다면 상체와 하체를 이어주는 중심부, 곧 '요추'에 해당된다. 신체가 온전하고 원활히 활동하려면 이 돌쩌귀 역할을 하는 척추의 중요부위가 건강해야 한다. 디스크나 요추 부분에 문제가 생기면 신체활동이 제대로 움직여 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꾸리아가 제일 하급 평의회이기 때문에 상급평의회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이다.

더 나아가 레지오는 꾸리아가 단순히 관리 기구라는 임무 이외에 다른 임무를 수행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꾸리아는 그 소속 쁘레시디움의 심장이며 머리이다. 꾸리아는 일치의 구심점이기 때문에 각 쁘레시디움과 연결하는 유대의 줄(곧 평의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일치는 더욱 튼튼해지며, 쁘레시디움은 레지오의 정신과 체계를 더욱 확실하게 드러내게 된다. 레지오의 본질과 관련되는 사항들을 충분히 논의하고 교육하는 곳은 꾸리아 회합뿐이다. 꾸리아 회합을 통하여 쁘레시디움은 이 모든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모든 행동단원들에게 확산시킬 수 있는 곳이다.”(24716-25)

어느 누가 간부로서의 책임을 맡고 있다면 레지오 단원들의 궁극적인 목표인 영혼들을 구원하는 강력한 수단인 레지오의 확장과 발전을 위하여 단원들로 하여금 책임 의식을 갖고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만드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2516-8) “책임은 참으로 모래를 금으로 바꾸어 놓는 힘”(25028)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 비인부전(非人不傳) 부재승덕(不才承德)


그래서 사람들이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을 한다. 사람의 일이 곧 모든 일이라는 뜻으로, 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써야 모든 일이 잘 풀림을 이르는 말. 그러나 옛말에 비인부전 부재승덕(非人不傳 不才承德)이란 말이 있다.

사람됨에 문제가 있는 자에게 벼슬이나 재능을 전수하지 말며, 재주나 지식이 덕을 앞서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인간 됨됨이가 갖춰지지 않은 자에게는 가르침을 주지 마라. "생각의 바탕은 인품이다. 생각은 행동이자 선택이다. 어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그 사람의 선택과 판단과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인성과 인품을 기른다고 당장 뭐가 잘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인성이 평가받는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온다. 평판이 만들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행동, 말투, 표정에서 인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것이 평판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특히, 큰 위기가 닥쳤을 때, 혹은 큰 기회가 주어졌을 때야말로 그 사람의 인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할 것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책임을 전가할 것인가? 힘을 가졌을 때 그 힘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쓸 것인가? 이런 선택의 순간에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인성 자체다. 인성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머리가 좋고 재능이 뛰어나도 그것을 옳게 쓰지 못한다. 바르게 생각할 줄 모르면 바르게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은 나무처럼 가지를 뻗어 자란다. 한번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를 뻗으면 계속 그 방향으로 자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간단한 일일지라도 원칙과 도덕을 지켜야 한다."(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중에서) 그래서 나쁜 장교는 있을 뿐, 나쁜 사병은 없다.”(교본 137. 13)고 한 것이다.


 

3) 영성이란 수련을 동반한다. 흉내내기가 아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어떤 직위에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직위에 맞게 변화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표면적으로 해석하면 마치 사람의 능력보다는 자리가 더 중요하다는 말로 오해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능력이 있어도 주어지지 않을 때 그 사람의 능력은 발휘될 수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이러한 생각이 들 때가 간혹 있다. 특히 조직 내 구성원 간의 관계가 수직적이고 상식에 벗어나는 관례, 관습이 여전히 존재하는 조직이라면 더욱이 능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들어 준다고 할 때의 그 자리란 그냥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내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냥 자리에 대한 흉내내기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가 요구하는 직책을 수행하게 하는 내적이고 영적인 삶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중국 당나라에 선종의 황금기를 열었던 마조 스님이 젊어서 좌선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스승이었던 회향선사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무엇하려고 좌선은 하느냐?”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자 선사는 갑자기 벽돌 하나를 집어가지고 와서 돌에다 갈기 시작했다. 마조가 물었다. “무엇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그런다.” 마조는 픽 웃으면서 말했다. “벽돌을 간다고 거울이 됩니까?” “그러는 너는 좌선만 한다고 부처가 된단 말이냐?” 그제야 정신이 문득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마조가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사는 또 다시 되물었다.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수레가 움직이지 않으면 수레에 채찍질을 해야 할까 아니면 소에게 해야 할까?” “마조가 대답을 못하자 선사는 친절하게도 일러주었다. “선이란 앉거나 눕는 것만이 아니고 부처란 꼭 앉아 있는 것만이 아니다. 앉아 있는 모양에만 집착하면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거야.”

 

영성이란 흉내내기가 아니다. 흉내내기란 빙산의 일각을 보고 그 모양새만 따라 하려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그걸 보고 영성이라 하지 않는다. 어디서 유명한 강사의 좋은 강의 한번 듣고 기도 몇 번 했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드러난 빙산의 일각은 그 밑에 가라앉아 있는 어마어마한 자기 성찰과 수련의 결과로 저절로 나타나는 열매일 뿐이다.

예 1) 공자의 말: 논어에서는 인생 70이 되어서야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 하여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고 한다. 이를 줄여 나이 70종심’(從心)이라고 부른다

예 2) 피카소의 그림: 우리가 보기에 무질서하고 자유분방하게 그려진 것 같지만, 그 자유롭고 무질서한 경지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는 젊은 시절 정통기법을 무수히 연습했다는 점을 간과하기 일쑤이다.

 


4)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수련할 것인가?

 

교본 제162항에서 쁘레또리움 단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뉴만 추기경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그대는 성장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이것이 그대의 운명이며 가톨릭 신자의 필수적 요소이다. 성장은 또한 사도직을 물려받은 우리들의 특권이다. 그러나 도덕적인 성장 없이 물질적인 성장만 있다면 그것은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뉴만 추기경 / Cardinal Newman : 가톨릭 신자의 현 위치) 우리가 레지오를 하는 이유도 사실 그냥 딸랑 세례만 받고 아무것도 안 하는 신자가 되기보다는 끊임없이 성화되고 성장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레지오 단원의 신분만이 아니라 우리는 쁘레또리움 단원처럼 더 부가된 수련의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 미사참여와 성무일도 등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19-20)

 

그렇다면 자신이 성화되고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수련할 것인가? 당연히 하느님 말씀인 성경 말씀이다. 신자들에게는 이 말씀이 삶의 지침이 되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오랜 시간 말씀을 읽고 새기고 내면화시킬 때 삶에 무게중심이란 것이 생긴다. 그리고 이 삶의 무게중심이 바로 영성이 되며, 이 무게중심에서 우리가 올바른 길과 방향을 가게 해준다. 무게중심도 잡히지 않았는데 올바른 방향을 갈 수가 없다.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 중심을 잃어버리면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축구 경기, 볼링, 테니스 등 무게중심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공연히 힘만 준다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건강한 몸을 갖추려면 필연적으로 튼튼한 뼈와 적당한 근육과 혈액순환이 좋아야 한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잘 먹고 적당한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건강을 관리한다. 이처럼 몸의 삼대요소가 튼튼해야만 건강한 육체를 유지할 수가 있듯이, 신앙에도 삼대요소를 구비해야 한다. 그 삼대요소로 해당되는 것이 자기 믿음에 대한 이해와 봉사, 그리고 기도이다.

첫째로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이해는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 하느님 말씀에 맛들여야 한다.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예로니모)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 또한 바로 이 계시된 진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기반이 튼튼하면 할수록 흔들리지 않으며,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과 같은 건강하고 올바른 신앙의 뿌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 신앙의 뿌리가 되는 것들에 무지해서는 잘못된 신심이나 사이비에 현혹되기 쉽기 때문에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 어렵다.

그러나 건강한 신앙생활이란 것은 성경구절을 많이 외우고 교리에 대해 해박하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행동에 옮겨지고 삶에 운용되어야 할 근육이 필요하다. 건강한 신앙생활에 있어서 근육과 같은 두 번째 요소는 이처럼 봉사를 통해 얻게 된다. 근육은 쓰면 쓸수록 단단해지듯이 봉사란 것도 안 해 본 사람들이나 엄살을 부리지, 하면 할수록 더 큰 일도 해낼 수 있다. 그러나 봉사는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타인을 위해 내어주는 희생과 배려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봉사는 겸손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 내면에 부드러움과 겸손과 온유로 삶에 윤기가 흐르고 부드러운 살결처럼 온화함을 지녀야 한다.

셋째로 건강한 신앙생활이란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이해나 봉사만 있어서도 안 된다. 온전히 자신을 잡아 바치는 뜨거운 열정, 곧 혈액순환과 같은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기도에 해당한다. 기도를 통해 자신의 욕망과 내적으로 무질서한 애착들과 같은 불순물들이 여과되고 정화되어 자신의 지향이 올바른지 또 자신이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지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되며, 이를 온전히 수행해내기 위해 그분께서 함께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영적 요소를 다 구비하고 있는 신심단체가 바로 레지오 마리애이다. 주회합을 보더라도 교본연구, 활동 보고, 기도가 담겨져 있다. 교회 내에 이 세 가지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는 단체는 레지오 말고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레지오 단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5) 주일 전례(사순 제1주일 나해) 말씀 묵상


사순 첫 주일인 오늘 들려주는 복음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셨다는 내용을 전해준다(마르 1,12-15). 광야를 생각할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광야는 버려진 땅이다. 광야는 우리의 생을 지탱해줄 기본조건들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광야는 자신의 바닥을 대면하게 하는 빈 들이다. 광야는 우리 마음 바닥 깊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우리 삶에 황폐함, 외로움, 갈증 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 보게 해주는 자리이다. 삶의 조건들이 결여된 광야에 섰을 때 자신은 거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자기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역설적으로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광야는 우리 삶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보물과 같은 곳이다. 작금의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미사나 주회합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우리 신자들과 레지오 단원들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광야는 우리에게는 시험의 장소요, 유혹의 장소이다. 광야 삶을 보도하는 성경본문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이 시험또는 유혹이라는 표현이다. ‘시험’(test)이란 말과 유혹’(tempt)이란 말은 그 근본 의도부터 차이가 있다.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시험이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정화시키고 단련시키기 위해 갖가지 위험과 시련을 허락하신다는 취지가 담겨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또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이 장애와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시험이 없으면 실력이 향상되지 않는다. 학교에서 기회있을 때마다 시험을 자주 보는 애초의 취지는 시험으로 학생들의 우열을 가려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다.

광야에서 마주치는 삶은 우리에게 두 가지 얼굴을 보게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든다. ‘하느님의 보살핌삶의 현장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얼굴이다. 광야에서 우리가 어떤 얼굴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길이 달라진다. 보살핌의 얼굴을 보지 않고 고통스러운 얼굴만을 바라본다면 불평과 불만, 핑계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두 얼굴을 보여주는 광야에서 하느님의 돌보심의 얼굴을 바라보면 비록 시험을 받긴 하겠지만, ‘고통의 얼굴만 쳐다보면 이내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두 얼굴을 보여주는 광야에서 고통스러운 얼굴만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서 어려움이 닥쳐올 때마다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기보다는 끊임없이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얼굴만을 보았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동안 자기들에게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사실 인간 성향 자체가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에 치우치기 쉽기에 광야에서 보살핌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광야에서 보여주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의 연속이었다(탈출 15-17; 민수 11-18).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못 견디게 그리워한 것은 이집트라는 세속적인 도시문화였다. 고기도 구워먹고, 술도 마시고, 한바탕 즐기고, 금송아지 앞에서 춤도 추는 그런 삶이다. 그들은 그런 삶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화려한 이집트의 도시문화에 중독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 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돈과 명예, 학벌과 지위가 가져달 줄 수 있는 권력과, 편리함과 쾌락을 보장해주는 풍요로운 세속문화 가치에 길들여져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삶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광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반항하면서 살아간다. 이들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 겪게 되는 고통이 싫어서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발버둥친다. 얼마나 도시문화에 중독되었는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만나 때문에 오히려 입맛마저 떨어졌다고 감히 불평해댔던 이들이다(민수 11,4-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곧바로 사람들에게 가서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보통 회개’(悔改)라고 하면 모든 죄를 다 끊고 삶의 획기적인 변화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변화라 하면 외적인 변화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내적인 변화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있는 삶의 자리에 너무 익숙해져서 설령 그 삶의 자리가 아무리 우리를 구속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해도 마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기 때문에 막상 그것을 떠나라고 하면 떠나기 싫은 것이다.

회심을 가리키는 그리스어의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와 라틴어로 콘베르시오(conversio)는 단순히 윤리적으로 나의 몇 가지 고질적인 죄에 대한 회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정신세계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가치기준에서 일어나는 정신세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신세계를 기준으로 삼고 하느님의 거룩함, 하느님의 온전함을 닮는 전인적인 방향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선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듯이 우리가 지은 죄에 머무르실 것 같지 않다. 넘어진 인간이 자기 죄에 주저앉아 매몰되어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의식전환과 함께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