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Se.주간회의 훈화(2021.2.24)2021-02-25 04:36
작성자 Level 9

- 사순절 재계 단식, 기도, 자선 -

 

단식자선기도는 유다인들이 속죄를 하기 위해 자주 실행하던 3대 신심행위로 손꼽히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이 세 가지 신심은 우리 신자들에게도 중요하다. 성무일도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에는 이 세 가지 신심에 대한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의 강론을 싣고 있다.

믿음을 견고히 세워 주고 신심을 변함없이 유지해 주며 덕행을 지속시켜 주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기도와 단식과 자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는 문을 두드리고 단식은 청하며 자선은 받습니다. 기도, 단식, 그리고 자선, 이 세 가지는 한 묶음이고 서로서로가 의지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기도의 영혼이고 자선은 단식의 생명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떨어져서는 제대로 작용할 수 없으므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만 있고 다른 두 가지는 갖고 있지 않다면 한 가지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단식은 자선의 물을 받지 않으면 싹을 내지 못하고, 자선이 메마를 때 단식도 가뭄을 겪게 됩니다. 자선과 단식의 관계는 비와 땅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잘 닦고 육신을 정결히 하며 악을 뽑아내고 덕행을 심는다 할지라도 자선이라는 물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단식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이 세 가지 신심으로 위선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계신다(마태 6,1-6.16-18). 위선자란 자기가 지니지 못한 덕을 가장하는 자들이거나, 좀더 깊은 의미에서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자기의 선행에 너무나 만족한 나머지 스스로 도취되어 자신의 선행 속에 들어있는 오만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인 것이다.

우선 첫째로 자선. 자선을 베푸는데 진지하게 노력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진짜 동기가 명예욕이거나 사람들을 자기 소유로 노예화 하는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고 계시며, 하느님의 뜻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자들이다. 연예인들 중 기부천사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인들 중에서도 때가 되면 그러한 행위를 하면서 복지시설을 찾아가 사진을 찍어 홍보용으로 삼는다.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그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좋게 보기 때문이기에 자기 이미지 관리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타이틀이 없이도 평소에 그렇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선의 모델을 보여주신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남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스스로 나팔을 불며”(6,2) 공치사 하지 말라, 그리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6,3) 은밀하게 숨겨두라는 것이다.

둘째로 기도. 기도에도 은밀한 위선이 있을 수 있다. 하느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기도는 전례를 통한 공동체의 기도, 곧 미사보다 완전한 기도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 백성의 기도는 자신이 드러나지 않고 별 느낌이 와 닿지 않기 때문에 기피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사적인 기도나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끌고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기도나, 손짓, 몸짓, 울부짖고 소리를 질러대며 하는 열정적인 기도가 더 느낌이 온다는 사람도 있다.

경건하고 열심한 유다인들은 번화한 거리, 회당 입구, 층계 등 그 어디에서라도 하루에 세 번 기도를 올렸다. 간혹 이슬람인들도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때만 되면 자리를 펴고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이러한 기도행위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골방에서” “숨어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6,6) 하신다. 그렇게 유난을 떨지 않아도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알아주신다는 것이다.

미사 중 하게 되는 보편기도 지향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세상이나 사람들의 고통을 위한 중재기도이다. 이런 데 관심이 없고 고통에 공감을 못하니 신자들이 자기와 관련된 자기 욕심만을 청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요즘은 종교를 빙자하여 특정 정치적 목적으로 모여 집회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셋째로 단식. 요즘의 단식은 살을 빼기 위한 건강관리 차원에서 하기도 하며, 특정인이 이해관계와 집단의 정치적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는 단식도 있는데, 이것은 종교적인 취지와 상관이 없다. 종교인들에게도 단식 역시 세속적 관점에서 하느님을 억지로 인간의 요구에 따르게 하려는 수단으로 남용될 수도 있으며 보여주기식의 위선이 따를 수 있기에,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소신이나 믿음을 과시하기 위하여 겉으로 드러내며 단식하는 위선자를 책망하신다(6,18).

하느님 백성에게 단식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자기를 비우는 방법이다. 여기에 기도가 수반되면 육신의 비움은 마음의 가난을 얻는데 하나의 징표이자 도움이며, 하느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유혹을 극복하기 쉽게 해준다. 우리에게 단식은 가난한 자들의 굶주림을 직접 느껴 봄으로 그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더 쉽게 생기며, 단식함으로써 자기 희생으로 절약된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눌 수 있다는 취지이지, 단식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생활화하는 것은 청중들의 눈과 귀를 의식해서 하는 연기가 결코 아니다. 우리는 남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봉사는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스도교적 생활은 결코 무대공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꾸준히 기도한다거나 정말 희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자기 자랑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러나 은연중에 자기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거나 남들과 다르게 열심히 살아간다거나 바쁘게 뛰고 있다는 점을 암암리에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시키려거나 싸인을 보내는 경우가 있다. 자신은 남들과 달리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거룩함을 지향하는 데는 이처럼 암암리에 위선이 함께 깃들어 있다는 점이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혹자는 사순절(四旬節)40일간의 긴 피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피정은 삶의 연습이자 영적 수련이다. 그간 흐트러졌던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40일 기간동안의 긴 피정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전례에 두 번째 독서를 통해 바오로 사도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는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1코린 5,20)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이며,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6,2)이니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6,1)는 말씀이다.

사순절을 시작하며 재의 예식 때 머리에 재를 얹으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사람이 흙에서 왔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세상의 가치에 휩쓸려 본래의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잃고 살아온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보통 회개’(悔改)라고 하면 모든 죄를 다 끊고 삶의 획기적인 변화를 생각하기 쉽다. 사람들은 변화라 하면 외적인 변화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내적인 변화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있는 삶의 자리에 너무 익숙해져서 설령 그 삶의 자리가 아무리 우리를 구속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해도 마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기 때문에 막상 그것을 떠나라고 하면 떠나기 싫은 것이다.

회심을 가리키는 그리스어의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와 라틴어로 콘베르시오(conversio)는 단순히 윤리적으로 죄에 대한 회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정신세계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가치기준에서 일어나는 정신세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신세계를 기준으로 삼고 하느님의 거룩함, 하느님의 온전함을 닮는 전인적인 방향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선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듯이 우리가 지은 죄에 머무르실 것 같지 않다. 넘어진 인간이 자기 죄에 주저앉아 매몰되어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의식전환과 함께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