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월간 레지오 마리애 상임위원회의 영적 훈화(2021.2.25)2021-02-26 11:21
작성자 Level 9

월간 레지오 마리애 상임위원회의 훈화

-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독서와 복음 -

2021. 2. 25

  

오늘 독서는 에스테르서에 나온 기도 내용(에스 4,17)이다. 이 책은 페르시아 임금 크세르크세스의 왕비가 폐위된 후에 포로로 잡혀온 유다인들 중 왕궁에서 봉직하던 모르도카이의 사촌이며 양녀인 에스테르가 페르시아 왕비가 되고, 새 재상이 된 하만이 모르도카이와 갈등으로 음모를 꾸며 유다인을 몰살하려고 할 때 에스테르가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간청하여 자기 민족을 구했다는 이야기이다.

원래 에스테르기가 정경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하느님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인종 학살의 잔혹상을 정당화 또는 경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는 전통 싱앙에 충실한 유다인들에게 걸림돌이고, 후자는 양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걸림돌이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책은 아가와 에스테르기뿐이다. 그래서 원래 하느님과 관련된 내용이 없던 167절로 된 히브리어 성경본문에 그리스어 칠십인역본에서 107절을 첨가하여 하느님을 언급하며 하느님의 주권과 율법 준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된 것이다. 오늘 독서를 자세히 보면 기도 내용을 전하는 것이 4,17 한 구절인데, 그리스어 첨가 본문이 해당 절 바로 옆에 동그라미 안 숫자(①②)와 함께 있다.

사실 이 책에서 나오는 내용은 현대적 의미에서 볼 때 역사적 자료와는 거리가 멀다. 에스테르기에 나오는 임금(에스 1,1)을 제외한 다른 모든 등장 인물들은 알려진 바 없다. 또한 자신들에 대한 말살 정책에 대항하는 유다인들의 조직적 반격은 유다 마카베오 형제들을 제외하고 역사적으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소설과 같은 이야기의 핵심에는 유다인들의 실제적 체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을 말살하려는 시도는 역사상 여러 번 있어 왔기 때문이다.

에스테르기에 담긴 하만의 유다인 말살 시도는 그중의 하나로, 날 택일을 주사위로 던져 정했던 사육제적인 경향을 띤 푸림절”(9,24-26) 축제를 상기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다. 전통적으로 유다인들은 이 축제 전날 저녁과 당일 아침에 이 에스테르기를 낭독하는데(축제오경), 낭독 도중에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은 하만의 이름이 나오면 야유하는 소리를 내지른다. 사실 푸림절은 유다교 축제의 특징인 거룩함과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카니발이다. 이 축제에는 기도나 제사와 같은 종교적 행사는 없고, 많은 사람들이 기이한 옷을 입고 가면을 쓴 채 마음껏 먹고 마신다.

그래서 주사위를 뜻하는 외래어 푸림”(9,24-26)에서 나온 이 축제는 원래는 이교도들의 축제였는데, 유다인들이 이를 자기네 축제로 받아들였음을 가리킨다. 자신들이 겪어야만 하는 박해 앞에서, 유다인들은 이러한 축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하면 이 축제를 자신들의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도로 삼을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이다. 유다인들은 다른 축제들처럼 이교도들의 축제를 받아들여 이를 역사 속으로 삽입시켰다. 마치 그리스도교가 예수 성탄 대축일과 관련하여 그렇게 했듯이, 자신들의 역사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이교도들의 축제를 수용하여 자기네 전설을 신앙적으로 정당화한 것이다.

에스테르서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의미와 일상 체험을 통해 전해주는 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다름에 대한 권리를 흔쾌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새롭게 지적해 준다는 데 있다(3,8 참조). 유다 백성이 여러 나라에 퍼져 살게 된 이후, 이들은 여타의 소수 민족들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이로써(그들의 독특한 유다인 전통과 율법준수) 박해의 대상이 되어 왔다. 14세기 유럽의 대흑사병을 계기로 한 유다인 학살,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또는 독일의 나치당과 그 공범자들이 채택한 최종적 해결은 이에 대한 비극적인 실례들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말살하려는 그 모든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존속하는 것은 당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이 민족을 선택하신 하느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바로 이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또 이들을 바로 그 속에서 살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만에 의해서 모의된 유다민족의 말살 위기 앞에서 그 문제를 하느님께 탄원하며 풀어나가고 있다.

그리스어본 에스테르기 4장에는 모르도카이의 기도와 에스테르의 기도가 들어있는데, 오늘 독서 기도(4,17)는 에스테르의 기도이다. 이들은 민족의 위기 앞에 인간적이고 정치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기보다 우선적으로 하느님께 탄원을 드리며 기도로 풀어나가고 있다. 마지막 10장에서 모르도카이가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그 모든 일이 하느님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늘 복음도 기도에 대한 내용이 주제로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신뢰를 가지고 하느님께 청하라고 하신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예로부터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표현은 종교 언어로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청원을 들어주신다는 착상은 예언서에 많이 등장한다(이사 30,19; 58,9; 65,24; 예레 29,12-14; 호세 2,23). 그래서 신앙인들은 하느님께 청하고, 하느님을 찾고, 자비의 문을 두드린다.

빵과 생선은 유다인들의 일상 음식이다(4,17-19; 15,33-36). 빵 대신 돌을 준다는 착상은 아마도 광야에 빵의 생김새와 비슷한 돌이 있는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생선 대신 뱀을 준다는 착상도 실제로 겐네사렛 호수에서 잡히던 물뱀이나 뱀장어처럼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먹을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는 것을 상기했을 것이다(레위 11,12). 돌이나 뱀이 빵이나 생선처럼 모양은 비슷하지만 먹을 수 없는 것은 준다는 점에서는 같다. 악한 사람도 제 자녀들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야 자녀들의 청을 더 잘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대비논법(7,11)을 들어 하늘의 아버지께서 유사한 물건을 가지고 아들을 속이거나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의미로 풀어나갔다.

병행하는 루카복음(루카11,9-13)에서는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는 표현을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1,13)로 고쳤다. 성령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던 루카가 좋은 것성령으로 고친 것은 상당히 의도적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시고, 우리가 원하는 피상적인 다른 무엇보다도 제일 좋은 것을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해주시는 말씀 안에는 우리가 기도할 때 중요한 마음 자세가 담겨 있다. 예수님께서 청하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뜻을 청하고 찾으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서도 그러하듯이 제자들은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를 청해야 한다(루카 12, 22-31). “찾으라는 것도 터무니없는 자기 욕심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의 전승에는 찾다는 말이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신명 4,29; 2사무 21,1; 시편 105,4; 이사 65,1).

지혜문학에서도 지혜와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는 이가 그것을 발견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잠언 2,4-5; 8,17; 지혜 6,12). “두드리라는 것 또한 열처녀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듯이(마태 25,1-13). 하느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나 그 준비와 정성이 우리에게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심금을 울릴 정도의 정성으로 항구하게 하느님의 마음을 두드리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청하는 것은 건전한 정신을 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이고, 찾는 것은 진리를 구현할 길을 찾는 것이며,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진리를 구현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주님의 산상설교2,21,71-72)고 풀이하고 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현실적인 조건과 어려움들 때문에 주님께 청하게 된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기도의 자세는 우리가 아쉬울 때만 일시적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다. 현재의 이 어려운 처지에서 하느님께서는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으며,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사심 없는 우리의 바람을 청하는 대화이자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겸허하게 살아가려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것에 대한 관심과 갈망, 그리고 정성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 구절들을 해설하면서 재물과 덕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대비시켜 설명한다. “재물은 그것을 발견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찾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쓴다. 그런데 덕의 경우에는 그것을 분명히 받게 된다는 약속이 있는데도, 재물에 대해 보이는 열망에 비하면 아주 작은 마음조차 보이지 않는다.”(마태복음강해23,4). 맹자 또한 제나라의 울창했던 우산(牛山)이라는 곳이 사람들의 욕심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린 비유(牛山之木)를 들면서 세상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기르던 개나 닭을 잃어버리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것을 찾으려고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잃어버리고는 도무지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人有鷄犬放則知求之 放心而不知求).”고 개탄한 적이 있다”(孟子告子章句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