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제505차 월례미사 강론(2021.2.28)2021-03-01 07:18
작성자 Level 9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자신의 광적인 믿음과 신념이, 또 그릇되고 빗나간 확신은 타인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어서 다른 이들에게 회의감과 증오심을 줄 수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자기 종교에 대해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결혼을 하게 되면 심각하게 다가오는 문제가 바로 집안의 종교 문제입니다.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자기네 집안이 잘 안 되는 까닭이 천주교를 믿는 며느리가 집안에 들어와서 그렇다는 상식 밖의 이야기들이 오간답니다. 일가친지들에게까지 배척당하고, 급기야 자신의 종교를 포기해야 하는 사례까지 생깁니다. 종교가 일상생활에 가치를 부여하고 고달프고 피곤한 삶에 보람과 기쁨을 주며, 화목과 평화를 유지해주는 참되고 성숙한 인간의 길을 가르치기는 고사하고, 한 종교의 이름으로 다른 종교를 박해합니다.

요즘 간혹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특정 종교 집단은 자신들의 생존과 관련된 이익교세 확장이 지역사회나 이웃의 보건생명을 무시하고 있는 모습은 이웃 없는 배타성나 몰라라식 근본주의를 지닌 이단의 특성 탓이기도 합니다. 더러 세속적 관점에서 정치적 성향마저 드러내고 있는 이들의 빗나간 신심은 종교적 탈만 썼을 뿐 이들에게는 영성도 희생도 없습니다. 세상과 함께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며 구원의 길로 이끌기는커녕 태생부터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에 초점을 맞춰 시작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화목과 평화를 주기보다는 분열과 증오심만을 심어줍니다. 실로 종교의 자유와 공동선의 경계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해줍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의 시작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보시려고그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22,1). 아브라함에게 내린 이 시험이란 것이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끔찍한 명령이었습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성경 본문에는 그 이야기가 나오게 된 삶의 자리’(Sitz im Leben)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시대에 그 시기에 안고 있는 삶의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삶의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창세기 아브라함의 제사 이야기’(창세 22,1-18)에는 이러한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이 이야기 배경에는 아이를 번제물로 바치는 고대 가나안 지역에 행해지던 우상숭배의 경신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서부 셈족이 살던 팔레스티나와 북부 이집트 여러 곳에서 어린애들의 유골을 집단적으로 발견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어린 아이를 불살라 바치는 것이 신의 마음을 가장 깊이 사로잡는 경신례로 보았던 모양입니다. 특히 시련과 침략 등과 같은 비극적인 상황이 닥쳤을 때 맏아들을 희생제물로 봉헌했습니다.

이 악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올 때 받아들인 이교적 풍습으로 추정되는데, 율법(레위 18,21; 20,2-3)과 예언자(예레 7,31; 에제 23,37)들이 강력하게 배척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행해졌으며(2열왕 16,3; 17,17; 21,6), 이스라엘이 이 악습에서 온전히 빠져나오게 된 것은 유배시대 이후에 와서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대신 소나 양으로 희생제물을 바치던 이스라엘의 제사도 나중에 예언자들의 줄기찬 노력으로 보다 더 높은 차원의 희생을 지향하게 됩니다. 곧 이런 희생제물보다는 봉헌자들의 통회하고 뉘우치는 마음, 진실된 마음과 자비로운 행실이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드린다는 것입니다(시편 40,7-8; 호세 6,6; 마태 9,13; 히브 10,5).

그래서 오늘 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창세 22,1-19)에는 두 가지 핵심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주위의 가나안 우상숭배 경신례처럼 어린 아이의 희생제물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과 둘째, 근본적으로 우리를 시험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대해 인간이 어떠한 태도로 응답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아주 오래된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시험’(test)이란 말과 유혹’(tempt)이란 말은 그 근본 의도부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시험이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정화시키고 단련시키기 위해 갖가지 위험과 시련을 허락하신다는 취지가 담겨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또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이 장애와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시험이 없으면 실력이 향상되지 않지요. 학교에서 기회있을 때마다 시험을 자주 보는 애초의 취지는 시험으로 학생들의 우열을 가려내기 위함보다는 그들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시험이란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 시험에 실패했다면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선택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셨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시험은 이 세상 시험과 달리 우열을 가리거나 떨어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이 완성에 이를 때까지 시험을 계속하셨을 것입니다.

늘그막에 어렵게 얻었던 이사악의 존재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였고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의아스럽게 만든 점은 아브라함이 이 명령에 아무런 저항없이 순종하여 따랐다고 전해줍니다. 정상적으로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있었어야 할 저항이나 반항조차 없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추호의 의문이나 의심도 없이 맹목적으로 이 명령을 수행했다면 오히려 그는 믿음의 조상은커녕 광신자로 낙인찍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본문은 아브라함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밝히지 않고 철저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아브라함의 침묵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그의 마음속 번민과 고뇌의 체험이 우리 자신의 체험이 되도록 초대를 하는 것 같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창세 15,5)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22,17) 자손이 불어나리라는 축복의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십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하나에서 하나를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산은 인간의 산술적 계산과는 다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하느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움켜쥐고 싶은이사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꼭 자녀일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 온 것일텐데 내 것, 우리 것이라 여기는 그릇된 태도가 바로 내가 놓지 못하는 이사악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그 외아들을 선물로 주셨기에 당연히 그분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아브라함이 이사악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 머물러 있었다면 하느님의 축복의 약속은 실현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얻는 것과 잃는 것으로 얽혀 있지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얻는 것을 좋아하고 잃는 것을 싫어합니다. 명예가 되었건, 지위가 되었건 혹은 친구나 돈, 물건 등 무엇이든 얻는 것은 좋아하고 잃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이란 이처럼 지금 당장 눈앞의 일만 가지고 손익을 따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전 생애의 과정을 통해 어떤 선택과 결단이 참으로 얻는 것이 되고 잃는 것이 되었는지, 또 그와 같은 선택과 결단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열린 눈으로 내다보아야 합니다.

잃는다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만도 또 나쁜 것만도 아닙니다. 우리네 삶에는 더러 잃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크게 버릴 줄 아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무엇에 쫓기듯 허겁지겁 조급하게 서두르며 차분히 참고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이건 자꾸 채우려고만 할 뿐 비울 줄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갈증의 상태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돈이나 물건, 심지어 사람까지도 절대로 혼자서 찾아오는 법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탐욕이라는 친구가 함께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는 한 쪽에서 너무 많이 차지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웃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영어에서 소유하다(private)’는 표현은 원래 라틴어로 빼앗는다(privare)’는 표현에서 나온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사유한다는 것은 이웃에게는 질투와 시기과 원망이라는 대립을 낳게 마련이지요.

 

표면적으로는 너무도 가혹하고 끔찍한 내용이 실린 이 이야기를 가지고 교부들은 이사악에게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 제물이 되신 사건의 예표(豫表)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외아들인 것처럼(마르 9,7) 이사악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몸소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갔던 것처럼 이사악도 장작을 등에 지고 모리야 산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것처럼 이사악도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에 따라 자발적으로 묶여 제단 위에 누웠다는 것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사악은 모리야 산에서 죽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골고타 언덕에서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정적 순간에 하느님이 개입하시어 외아들의 죽음을 막으셨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참혹한 죽음을 그대로 허락하셨습니다. 이사악이 모리야 산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 자기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몰랐던 반면 예수님은 공생활 어느 시점부터 십자가 죽음의 길이 아버지의 뜻임을 아시고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했습니다(마르 9,2). 따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그들에게 뭔가 가르침을 주시기 위함이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고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십니다(9,3-4). 병행하는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중에 예수님의 모습이 변모하셨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은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시고,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예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분의 죽음에 관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했습니다(루카 9,28-31)

이 신비스럽고 영광스러운 모습에 도취된 베드로가 두 제자들을 대표하여 이야기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 9,5) 베드로가 언급한 초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초막축제와 연관이 있습니다(레위 23,39-43; 느헤 8,14-15).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느님께서 세말에 당신 백성들과 함께 초막을 지어 사실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에제 37,27; 43,79; 요엘 3,21; 즈카 2,10-11; 8,38; 토빗 13,10). 베드로는 이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체험을 연장시키고 싶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의 신비에 대한 부적절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초막에 들어가기 위해 희생과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점은 무시한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신앙체험의 자기도취와 열광에 빠져서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만이 받아 그것을 독점하려고 베드로처럼 초막을 짓고 머물러 살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생애를 살아가노라면 소중한 체험들을 그 여정에서 수없이 하게 되지요. 그것들은 또한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당신의 사랑이며 또한 고달픈 길을 은혜로이 걸어갈 수 있는 큰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수난에 앞서 강한 추억을 심어주기 위해서 특별하고도 신비스러운 변모 체험을 보여주셨을 것 같습니다. 미구에 닥칠 당신의 수난과 죽음, 더 나아가 당신이 물리적으로 함께하지 않으실 시대에 제자들의 박해와 고난, 그에 따른 방황과 불안을 예견하셨기에, 오늘의 이 체험을 그때 떠올리며 제자단의 기둥으로 세 사람이 남아주길 바라시는 스승의 깊은 배려가 아니었을까 합니다(9,2).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9,9).

수난과 고통의 길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힘겨운 길입니다. 적당히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으나, 신자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사랑하시기 때문에 더 큰 시련을 주시는데, 이는 더 큰 행복과 영광에 우리를 불러 주시고, 또한 거기에 참여시키시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을 당신의 도구로 쓰실 때에는 그 전에 반드시 그 사람을 마구 뒤흔들어 놓으셨다는 사실을. 그분께서는 그 사람을 찬란한 광채로 비추시기 전에 그를 어둠 속에 처절할 정도로 내버려 두셨던 시간들을. 또한 그 사람에게 소중한 것을 잉태시킬 때에는 그 전에 그를 극심한 고통과 외로움 속에 홀로 내버려두어, 시시각각으로 다가드는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하고, 심지어 모함과 굴욕과 건강과 생명조차 위태로운 지경까지 빠지게 하셨다는 사실을 저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선정된 창세기 본문은 드문드문 빠져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중요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느냐”(22,7)는 이사악의 질문에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실 것”(22,8)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입니다. 일종의 고백이지요. 오늘에 이르기까지 돌보아 주신 하느님께서 미래에도 계속 돌보아 주실 것임을 굳게 믿는다는 의미 야훼 이레(ha,r]yI hwO:hy)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하신 고백과 같습니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2) 오늘 전례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역설적인 교훈이 있다면, 타인의 희생과 제물을 통해 자신들의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 하느님을 수단으로 삼는 광적인 신심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