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제505차 월례회의 훈화(2021.2.28)2021-03-01 07:20
작성자 Level 9

영적독서: 341. 영적 지도자(3176-31818) 

 

레지오가 그 성공 여부를 판단할 때는, 단원들이 영성적으로 얼마만큼 개발되어 있으며, 그 영성의 결실이 활동을 통해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본다. 따라서 단원들의 영신적 자질을 높이는 일을 주된 임무로 맡고 있는 영적 지도자야말로 쁘레시디움의 힘의 원천이다. 영적 지도자는 회합에 참석하여 단장을 비롯한 다른 간부들과 더불어 레지오의 규율이 잘 지켜지도록 보살피고, 조직이 영성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바르게 운영되도록 돌보아야 한다. 영적 지도자는 모든 잘못된 행위를 막아야 하며, 모든 정당한 레지오의 권위를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자신이 지도하는 쁘레시디움이 훌륭히 제 몫을 해내고 있다면, 그는 남다른 열성과 잠재력을 지닌 평신도들을 자신의 본당 안에 확보해 놓은 셈이 된다. 그러나 쁘레시디움이 좀더 가치 있고 어려운 활동에 나서도록 만드는 것은 영적 지도자의 역량에 달려 있다. 또한 쁘레시디움은 내부의 소극적인 태도와 외부의 장애를 헤치며 나아가야 하는데, 이것 역시 영적 지도자의 격려와 선도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레지오는 영적 지도자가 쁘레시디움의 영성적 원동력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사실상 모든 쁘레시디움이 영적 지도자의 지도에 크게 의존한다. 교황 비오 11세의 말처럼 나의 운명은 그대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그러므로 영적지도자가 단 한 번이라도 단원들의 신뢰를 무너뜨린다면 그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작은 모임이라도 하느님과 성모님과 영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겠다고 나선 신자들을 목자 없는 양떼처럼 내버려 둘 수있겠는가! 양떼를 내버려 두는 영적 지도자에게 최고의 목자이신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는가? "그 단체의 영혼이 되고, 모든 선한 활동에 영감을 주며, 열성의 근원이 되라."(교황비오 11)고 하시지 않겠는가? 영적 지도자가 쁘레시디움을 돌볼 때에는 수도회의 수련장이 수련자들을 돌보듯이 해야 하며, 단원들의 영신적 안목을 높이고 그들의 활동과 영성이 레지오 마리애에 맞갖은 수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원들의 영성은 목표로 하는 수준만큼 올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는 최고 수준의 덕성을 단원들에게 제시하여, 영웅적인 덕성이 있어야만 실천할 수 있는 일을 단원들에게 맡기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불가능한 일도 은총 앞에서는 무릎을 꿇게 되며, 은총은 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다만 영적 지도자는 단원들이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의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충성심을 발휘하도록 강조해야 한다. 이러한 충성심은 큰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기본 요건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의 성과는 결과를 통해서 드러나지만, 그 결과는 그때까지의 작은 일들이 차근차근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 평가를 할 때 함께 살아봐야 알지!”라는 말을 한다. 가까이 지켜보고 실제로 겪어봐야 안다는 것이다. 제대 위에서 미사를 드리고 강론 할 때야 거룩하게 보이지 않을 사제가 어디에 있을까? 저서나 매스컴으로 대할 때야 훌륭하게 보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도 일종의 메이크 업(Make Up)이다. 메이크 업 된 것에는 그 사람의 진정한 인간성을 담고 있지 않다.

멀리서 보는 사람에게는 사제나 사목자가 훌륭하게만 보이지만, 왜 하필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만은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의 소유자일까? 그 아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그가 거창하게 외쳐대는 복음설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두렵다. 함께 일하는 수도자나 보좌신부는 내가 상전의 히스테리나 맞춰주기 위해 출가했는가?”라고 자문할텐데 그 참담함으로 받은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제를 가리켜 이렇게 표현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멀리서 보고 가끔 한두 번 만날 땐 너무 좋으신 분!’, 자주 만나보니 뭐 그럴 수도 있는 분!’, 가까이 살아 볼수록 인간성이 상당히 의심스러운 분!’, 알고 보니 쌍놈!’”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 존경과 비난을 동시에 표하신다. 그들이 존경받을 수 있는 이유는 모세의 율좌(律座)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막중한 권한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2-3)

 

남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거나 남 앞에 자주 서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위선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고, 말이 많으면 행동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며, 무거운 짐을 백성에게만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마나 팔에 성구(聖句)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달고 옷단에도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니며, 잔치에서 맨 윗자리와 회당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즐겨 찾고, 거리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며, 사람들로부터 스승이며, 지도자라는 말을 즐겨 들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23,4-5). 예수님께 비난 받고 있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왜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를 생각해본다.

자존감이 약한 사람일수록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집착하게 된다. 자신의 내재적인 힘은 말씀으로부터 형성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사랑에서 나오는데, 이 힘이 약한 사람은 두려움을 안고 살기 때문에 남들에게 인정받고 관심받을 수 있는 외적인 것들을 붙잡고 집착하게 된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겉치레나 율법을 강조하는 이면에는 그들의 낮은 자존감이 숨어 있다. 그것은 엄하고 무서운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자존감이 약한 것처럼, 하느님을 두렵고 무서운 분으로만 이해할 때 같은 현상이 생긴다. 이들에게는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이 없다.

어떤 것에 대한 나의 집착 여부는 물론 그 동기나 지향까지도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참된 인식에 이르지도 못한 채 오직 자신에만 매달림으로써, 비록 종교적 구실을 내세우고 있어도 실제로는 우리 자신을 따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지내는 것이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이 그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네 신앙의 실질적인 스승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23,9-10).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계속 전해야 하고 다시금 가르쳐야 하는 사도직을 수행해야 하는 자들이 있다. 사제들 또한 단지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안내하기 위한 말씀의 봉사자일 뿐이다. 그러니 신자들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키기보다는 말씀 자체로 안내하여 오직 말씀자체이신 그분의 권능에 복종하여 진리에 순종하게 해야 한다.

 

사제들이 강론한 대로 행하지 않고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까닭에 교회를 등졌노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간혹 듣게 된다.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듣다 보면 자기네가 만난 사람들이 과연 그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정도로 자기들은 당당했을까 생각해본다. 아니면 그러한 것이 신자로서 교회까지 등지게 된 적절한 구실이었는지 자문해 보기도 한다. 자신과 관련된 사람 때문에 개인의 사적인 감정으로 하느님 말씀 자체를 배척한다는 사실은 더 우스꽝스러운 꼴이 된다. 그것은 마치 아기를 목욕시키고 목욕물만 버리면 되는데 아기까기 가져다 버리는 꼴이 된다. 달을 바라보아야 하는 입장에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중하다가 상처를 받고 손가락 탓만 하면서 달마저 안 보려고 하는 것이다.

오늘 영적 지도자와 레지오 단원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훈화를 시작하며 들려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으면 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2-3)

 

하루를 열면서 하게 되는 기도가 있다. 레지오 단원으로서 영적 지도자와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생각하며 이런 기도를 바치면 좋겠다.

 

주님, 저희를 소속된 교회 공동체 안에 끝까지 머무르면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사리에 맞는 합당한 주장을 하도록 하게 하시고

그 직분을 위해 겪어야 할 고초가 있다면

흔쾌히 받아들이게 하소서

결론은 주님께서 도출하도록 맡겨드리오니

설혹 내가 틀렸다 하여도

순명할 수 있으며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도

결코 서운해 하지 않으며

나의 뜻이 받아들여졌다 해서

결코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