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Se.서울Re.협의회 훈화(2021.3.10)2021-03-11 04:51
작성자 Level 9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독서와 복음 


 

오늘 미사전례독서(신명 4,1-9)의 권고의 내용은 신명기 법조문(5-28)의 서문에 해당한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이해시켜주기 위한 외적인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율법은 모세가 하느님의 백성에게 하느님의 뜻이 어떤지 잘 모르는 무지한 백성에게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고, 또 그것을 지켜나간다면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다는 취지에서 전해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독서인 신명기에서도 진정한 의미에서 율법을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가장 깊은 지혜를 깨치는 것이자 온전한 생명의 길에 들어서는 것(신명 4,5-6)이라고 전해준다.

그래서 신명기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함께 배우고 익히는 책, 하느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완전한 교재로 함께 배우는 공동체 안에 영원히 살아있을 책이다. 신명기는 오경을 완성하고 역사서와 예언서로 가는 길을 여는 성문(城門)’과 같은 책이다(16,18; 17,5). 그래서 신명기는 오경 가운데 하느님과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과의 관계 개념을 가장 영성화했다는 평가를 내린다. 그런데 신명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가르침, 곧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고백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과 정보나 지식과는 별도로 대상에 대한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어 아는 것과는 다르다. 전자는 정보나 지식 측면에서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알고자 하는 대상과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어 아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책이나 가르침 혹은 피정이나 영성 강의를 통해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친밀감을 형성하며 알아가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신학생이나 수도자들의 영적 여정에 있어서 초기에 자신이 느끼는 열등감은 일종의 완벽주의를 부추키고, 이러한 경향은 앎에 대한 확장시켜 나가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교회의 외적 규칙이나 계명을 잘 지킴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새로운 인식과 친밀한 사랑은 외적인 규정이나 법규뿐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법에 충실하기를 요구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각성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관대하고 너그러운 자세를 갖추어 가는 것 같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시는 것 또한 이러한 마음으로 율법을 읽고 깨쳐야 생명의 길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면서 율법의 정신과 당신이 전하고자 하시는 복음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계신다. 곧 구약성경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뜻과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뜻, 이 양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당신의 가르침인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의 서두에서 참된 행복의 길을 가르치시고(5,3-12),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건실히 유지하고 밝히기 위해 율법 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본질적인 정신과 의지가 무엇인지 여섯 개의 대당명제(5,21-48)와 이를 결론짓는 황금률(7,12)로 선포하셨다.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결국 예수께서 주시는 새로운 계명과도 같다. 그분은 새로운 계명을 통하여 구약의 율법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정신과 그 참뜻을 밝혀 주시면서 이를 지키는 인간의 심성을 한층 고양시키고 완성시켜 주신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하나도 없애지 않고 완성하는 길이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에 대한 태도는 명확하다.

율법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일 점이나 일 획에 집착하지 않고 이를 심화시키시고, 완성시키기 위해 때로는 과감하게 그 원천부터 이를 다루실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새로운 계명과 율법의 정신을 먼저 지키고 행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행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이로써 예수님의 말씀은 외적인 율법규정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태도는 법조문에 구애받으면서 영혼이 빠져있는 율법조항의 준수로 표리부동하게 살아가는 바리사이적 삶과는 다르다.

그러나 당시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들을 깨우쳤을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성령을 약속하셨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도 성령께서는 이 말씀들을 하나하나 깨우쳐주실 것(요한 16,12-15)이라고 하시면서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14,26)고 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깨우친 이가 바로 바오로 사도가 아닌가 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로마서를 통해 법전이라는 옛 방식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새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다”(로마 7,9)고 고백하면서 전적으로 새로운 그분의 길, 우리의 영적 생명에 생기를 얻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앎을 확장하거나 보완하고 충족시키는 가르침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을 통해 자아가 각성되는 체험을 해나가는 여정이다. 여기에는 외적 행동보다는 내적 동기와 지향이 더 강조되면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삶에 진정한 자유를 체험해가는 것이다.

과거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를 어떻게 완성했는지에 대해 영성적으로 접근하려 했다. 이 영성적 접근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파스카의 신비에 비추어 구약성경을 읽는 교회 안의 성경 해석과 일맥상통한다. “영성적 의미는 성령의 영향 아래에서 성경본문을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와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새로운 삶의 맥락 안에서 읽을 때 밝혀지는 의미이다.”(교회 안의 성경 해석」Ⅱ--2. 1996. 교황청성서위원회)

 

가끔은 스스로 독학으로 깨우친 이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더러는 스승과 함께해야 비로소 앎이 가능한 것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닥치는 대로 많이 읽고 많이 아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이들은 얼핏 많이는 아는 것 같은데 뭔가 들쑥날쑥하거나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더러는 편파적이기까지 해서 진정한 이치에는 이르지 못하는 경우를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은 더러 남의 가르침은 상대적으로 무시하거나 오만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책을 취사선택해서 골라 읽듯이 자신의 기존의 지식과 앎을 자신의 눈높이에서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수직적 차원에서 깊이 있게 들어가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스승의 존재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앎이란 스승에 대한 절대적 순종과 신뢰에서 시작된다. 스승을 우습게 알거나 무시할 때 그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다(논문지도할 때 스승의 역할). 이런 경우는 자신의 깨우침이나 오만함에 대한 부분이 야단을 맞거나 경계를 넓히기 위해서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중요한 점은 스승이 자신보다 깨달음이나 깊이에 있어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신뢰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교육학계의 오래된 불문률이 있다. “교육의 효과는 가르치는 내용보다는 가르치는 사람의 인격을 절대로 넘어서지 못한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5,19)고 하신다. 이러한 배움을 통하여 자신의 사심과 편견에 따른 관점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펴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자신의 무지와 무례함과 비참과 무력함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다.

이 사순시기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도 이처럼 진정한 예수님과의 관계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논어의 시작 말씀이 있다. 우리는 많이는 배우는 것 같은데 되새김의 과정이 너무 허술한 듯하다. 말씀은 많이 아는 것뿐 아니라 되새김의 과정이 필요하다(Lectio Divina). 전례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과 강론은 사제의 인격 안에 현존하기도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앎을 확장하거나 보완하고 충족시키는 가르침이 아니라, 전적으로 거듭되는 그분과의 친밀한 만남의 관계를 통해 새롭게 그분을 만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여정에서 우리의 영적 생명에 생기를 얻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