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Se.주간회의 훈화(2021.3.24)2021-03-25 05:59
작성자 Level 9

-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독서와 복음 - 


 

예언자들 편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유배는 오히려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의 회두를 위한 길을 닦고자 하신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월요일에 이 유배시기에 유다인들이 이교도의 암흑 세계에 진정한 신앙의 빛을 밝혀야 했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위엄을 증거하는 이 과업을 이행한 예언자가 바로 다니엘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왕의 궁전에서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자기 하느님의 위엄을 증거했다.

성경의 내용이 다 그렇지만, 다니엘서는 삶이 던지는 위기와 시련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에 대한 실존적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 독서 내용(다니 3,14-20.91-92.95)을 포함하는 다니엘 3장의 배경은 1장에 등장했던 다니엘의 세 동료가 우상 숭배를 거절한 탓으로 불가마에 던져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다.

2장과는 달리 3장에서 네부카드네자르는 현명한 군주가 아니라 어리석고 잔인한 폭군으로 등장한다. 그는 금신상(아마도 자기 자신의 상)을 만들어 놓고 문무대신들더러 거기에다 절을 하라고 명령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거절하자 임금은 그들을 활활 타는 화덕에 던지게 한다(3,1-23). 그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불길을 가마 밖으로 내몰아 세 젊은이를 보호한다(3,46-50). 세 젊은이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가 그리스어 역본에만 나오는 아자르야의 노래’(3,24-45)세 젊은이의 노래이다(3,52-90).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독서로 나온 이야기가 아자르야의 노래이며, 오늘 독서는 세 젊은이의 노래에 나오는 주인공들이다.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불가마에 던져진 세 젊은이의 이야기(3,1-24)도 수산나 이야기(13)처럼 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세 청년은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의 박해 때 불가마 속에 던져졌으나 그 가마 속에서 하느님을 찬미했던 청년들이다. 이들은 살아서 결국 바빌론 왕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어냈다.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세 젊은이의 모습에서 박해를 당하고 있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위로를 찾았다. 세례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천사)의 현존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불타는 화염 속에서도 기쁘게 하느님을 찬미하며 전혀 불에 데지 않고 자유로이 거닐고 싶은 것이었다.

독서에 등장하는 세 청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성무일도 첫째 주간 주일과 대축일, 축일 아침기도 두 번째 찬미가(다니 3,57-88.56)에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등장하는 이름과 동일인물이다. “하난야와 아자르야와 미사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다니 3,88) 바빌론 왕은 유배 중의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왕족과 귀족들 중 임금을 모실 능력이 있는 참하고 출중한 젊은이들을 선택하여 서기관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하고 임금에게 시중을 들게 했다. 그래서 임금의 내시장이 이렇게 뽑힌 젊은이들에게 각각 다른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다니엘은 벨트사차르, 하난야는 사드락, 미사엘은 메삭, 아자르야는 아벳느고라고 지어 주었다(다니 1,3-6).

이들은 머리가 명석하고 사리에 밝아서 다니엘처럼 바빌론 궁정에서 살게 되었지만,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앞에서 신앙의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왕은 우상 숭배를 거절하면 목숨을 앗아버리겠다고 위협하였지만 세 청년은 비록 죽게 되어도 우상 앞에 절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1; 3).

그렇지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다니엘서가 유배 중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삶의 자리는 이보다 훨씬 후대인 기원전 2세기 이스라엘 전역을 강타했던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시기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3우상숭배에 대한 임금의 강요는 시리아 셀레우키아 임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 자리에 황폐를 가져오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우고(다니 9,27; 11,31; 1마카 1,54), 이에 대한 숭배를 이스라엘 전역에 시행했던 사건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네부카드네자르 임금도 자신이 세운 상에 절하지 않는 모든 이를 사형에 처한다는 배경 설정부터 이미 그 의도가 분명하다.

오늘 독서에는 찬미기도가 빠져있지만, 이 이 찬미가의 결말은 그분께서 우리를 저승에서 구해 주시고 죽음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셨으며 불길이 타오르는 가마에서 건져 내시고 불 속에서 건져 내셨다.”(3,88)고 되어 있다. 결국 다니엘 3장의 이갸기는 아무리 우상숭배의 위협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신실함을 잃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적 이야기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그래서 오늘 독서 다니엘서는 이러한 기도를 통해 시험에 처해진 그들에게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신앙을 다분히 권장하고 있다.

 

이 세 청년들의 당당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느님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한 굳은 신뢰가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들에게 삶과 죽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삶 속에 이미 죽음이 내재되어 있고, 죽음 속에 영원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행동에 옮기는 것은 다르다. 예수님이 말씀하듯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사는 사람들은 자유롭다. 진리가 우리의 삶에 걸림돌이 되지 않고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귀와 눈을 열어 매일 나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도록 노력하는 길이 최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 안에 머물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러면 당신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요한 8,31-3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ἡ ἀλήθεια λευθερώσει μς.).” 예전에 신학생 때 우연히 이대 교육관 현관에 이 구절이 희랍어 원어로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대학의 교육관에 있었으니 다분히 학문적이고 이성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그저 머리로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깨쳐 보람을 느끼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당신의 말씀 안에 깊이 머물려 할 때 진리를 깨닫게 되며,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말한다. 그것은 이성을 넘어 말씀에 따라 삶의 방향을 결연하게 바로잡을 때만이 가능하다.

 

경영의 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후나이 유키오라는 사람은 경영에는 운()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운은 사람의 힘으로 조절 가능하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의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사물의 이치에 따라 행동하면 운이 따르지만 그것을 어기면 운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리란 하느님의 섭리나 자연법칙처럼 우리의 이해나 수용 여부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작용하는 영원불변한 사물의 이치이다. 사물의 이치를 주관하시는 진리의 하느님께서 세상을 통제하며 질서를 유지하신다. 우리는 단지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고 통제할 뿐이다. 바람의 방향을 내가 바꿀 수는 없지만 돛단배의 돛은 조정할 수 있다. 오늘의 날씨는 내가 결정할 수 없지만 영혼의 기상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얼굴의 모습은 내가 결정할 수 없지만 얼굴 표정은 선택할 수 있다.

내가 마음대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일들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일들로 걱정하고 조바심하는지 돌아본다. 내가 하고 있는 걱정의 대부분은 내 영향력이 미칠 수 없는 불필요한 걱정이다. 사람들은 종종 돛은 그대로 둔 채 바람 탓을 하며 내 뜻대로 불어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린다. 그래서 불만도 많고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원망도 곧잘 한다. 그럴 때는 자유로움이 없다.

그러나 바람의 방향을 알아 거기에 따라 돛을 조정하면 순풍에 돛 단 듯이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움직일 수 있다. 내가 진리이신 하느님께 주파수를 맞추고 사물의 이치에 순응하는 선택과 행동을 한다면 일이 순조롭고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또 헛되이 속을 끓이지도 않을 것이고 소모적인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내 멋대로, 내 식대로 일하는 게 아니라 진리에 순응하는 것, 그래서 하느님이 활동하시도록 협조자요 도구로서 날 비우고 여건을 만들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훨씬 자유롭게 될 것 같다.

이미 고인이 된, 교육자이자 우리말 운동가이셨던 이오덕 선생께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고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 초등학교 교사 시절의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스무 해 동안 나는 세속에 질질 끌려서 내 속마음대로 살아 보지 못했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내가 갈 길의 키를 단단히 잡고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이오덕 일기, 196458일 금요일).

우리는 곧 사순 시기의 성찰과 노력의 열매에 대한 추수기를 맞이한다. 그 열매는 세상의 생각이나 논리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진리에 따라 내 갈 길의 키를 단단히 잡고 살겠다는 분명한 결심이다. 이러한 삶은 진정한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 안의 자유는 오늘 독서에 나오는, 불가마 속에서도 무사한 세 명의 의로운 이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도록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