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 25)2021-03-25 06:12
작성자 Level 9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마리아 공경은 초세기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는 성경을 통해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초세기부터 형성되어 기리고 있었던 이 축일은 여러 교부들의 문헌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마리아 공경을 무엇보다도 전례(典禮) 안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례헌장은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를 전례 안에서 공경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67) 그럼으로써 사적 차원에서 성모 공경에 관하여 지나친 마음의 협소함이나 거짓 과장을 피하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회칙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에서 1차적으로 전례 안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례는 교의적 내용을 풍부하게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사목적으로 큰 효과를 지닌 만큼 다른 모든 예배의 탁월한 모범이기 때문입니다(1). 또 전례 안에서 마리아 공경은 항상 육화에서부터 영광스러운 재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신비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2). 전례 안에서 마리아 공경은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고, 그리스도께 속해있기 때문입니다(25). 사실 모든 그리스도교 예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드리는 예배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례 안에서 경축하고 있는 이 대축일은 주님의 성탄 대축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 대축일의 핵심에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인간이 되신 하느님 사랑의 신비인, 하느님의 육화(肉化)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신비에 있어서 하느님 구원의 의지에 마리아의 순종이 결정적으로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 구원신비가 미사 안에서 전례독서로 선정된 성경과 미사 고유기도 및 감사송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전례독서로 선정된 첫 번째 독서는 이사야 예언서입니다. 이 독서는 우리를 기원전 733-2년경의 유다 왕국 아하즈(BC735-715) 임금의 시대로 데려갑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약소국가들 사이에는 아시리아의 침공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인 정황에 한때 적이었던 북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반 아시리아 연합세력을 구축하여 동맹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제안을 거절했던 유다의 왕 아하즈를 제거하고 꼭두각시 왕을 앉히기 위해 유다를 압박해 들어가던 터였습니다(이사 7,6). 지도자로서 겁이 많고 약했던 아하즈는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불안해 하다가 결국은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아하즈는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결국 스스로 속국이 되려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사야 예언자는 위기와 시련의 시기에 가장 안전한 방법은 외국 군대의 힘보다는 신앙 곧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의존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징표를 청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하즈는 스스로 경건한 채 하며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노라고 그 제의를 거절합니다. 하지만 실상 아하즈의 내심은 징표를 받게 되면 이미 맺은 아시리아와 동맹을 포기하게 되어 그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하느님의 능력보다도 아시리아의 힘을 더 믿은 셈이지요. 그러자 이사야는 더 이상 아하즈와 말장난을 하지 않고 싫든 좋든 그에게 하나의 징표를 보여주는데,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독서의 내용입니다(이사 7,10-14; 8,10).

모름지기 지도자들은 위기 상황에서 어떤 선택과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선택이란 것에는 책임이 따르지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조차 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엉뚱하게도 애꿎은 사람들이 그 힘겨운 뒷감당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하즈는 위기상황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지속적으로 보호해주고 도와주신다는 징표보다는 정치적 실리를 추구하여 세상의 권력과 힘의 상징인 아시리아를 선택했습니다. 후대 역대기에서는 이 유약한 왕 때문에 유다 왕국이 얼마나 시련을 당하고, 백성이 얼마나 힘겨워 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2역대 28,16-27).

문득 아하즈 왕의 처신을 보면서 영적인 합리화라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영적인 합리화의 결과나 심각성은 사실 자신에게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경우가 더 큽니다. 영적인 합리화란 언뜻 보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양태로 나타납니다. 신앙은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자기만의 절대 기준만을 세워놓고 다른 것들을 거기에 맞추려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하느님을 잘 따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것은 어떤 문제에 대한 정직한 대면보다는 막연하게 우리가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기대치일 뿐입니다. 그리고 용기있게 그 문제들이나 그에 대한 자신의 느낌들에 정직하게 대면하기보다는 외면하고 회피하며, 자기와의 단절이 이루어지고, 자기와의 단절은 결국 하느님과의 단절에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즈카르야가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믿지 못해서 결국 벙어리가 되어야 했지만(루카 1,5-25), 이름도 없는 시골 처녀인 마리아가 오히려 구약에서도 선례가 없었던 동정녀 잉태라는 이 하느님의 계획을 믿고 순종한 믿음의 완전함을 보여주고자 합니다(1,26-38). 루카복음은 구원역사 안에서 마리아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에 관해 그 중요성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구약성경을 통틀어 하느님의 모든 소명의 핵심은 주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였듯이, 마리아는 하느님께로부터 메시아를 탄생시키는 소명을 부여받은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래서 하느님 백성 중에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들 중에서 부여된 가장 영예로우면서도 겸손한 모습 하나를 기억하게 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겸손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오늘 마리아에게서 다시 한번 발견합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인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뜻을 이루러 오셨다고 전합니다(히브 10,7). 진정 주님께서 원하신 것은 당신의 뜻과 구원 의지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작 인간의 의지나 욕심으로 제물이나 예물또는 번제물과 속죄제물(10,8) 하느님께 무엇인가 해드리고자 하는 거룩함을 빙자하여 그분의 뜻을 가로 막거나 무마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아하즈 왕이나 즈카르야 사제처럼 불확실하고 어려움 중에 의심하거나 쉽게 좌절하거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닌 엉뚱한 데서 찾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내가 원하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순종하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으며”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데서 나옵니다. 우리 인간을 위협하는 어려움과 시련 중에 또 신앙이 흔들리는 의혹 중에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의미와 또한 필요한 것들을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징표는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교회는 전례력에 따라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성대하게 지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성모님에게서 믿는다는 것낳는 것만을 의미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모님께 대한 신심은 그저 단순히 마리아가 구세주 예수님을 낳으셨기 때문만은 결코 아닙니다. 아드님을 혈육으로 또 몸으로 낳는 일은 신앙으로 낳는 고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홉 달이면 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예수님을 낳는 데는 베들레헴에서부터 해골산에 이르는 예수님 평생의 삶을 품고 다녀야 합니다. 그분의 삶 전체가 그 누구보다도 온전히 하느님을 향한 것이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순명한 참 신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철저히 순종하여 구세주를 세상에 탄생시키고, 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비통의 어머니요, 기구하고도 쓰디 쓴 인생길에서 주님께 대한 순종과 신앙으로 영예와 영광을 차지한 복된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에게서 기적이나 신화적인 요란한 장식들을 제거한다면, 그저 평범하고 순박한 시골 아낙의 모습과, 여기에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에 따라 생활한 여인 본연의 모습이 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를 볼 때 그분의 뜻에 협력하고 순종하는 일이란 어느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은, 시작에 불과한 여정이었습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부르심의 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은 길입니다. 그리고 이미 길을 떠난 영혼은 어느 한 곳에 머무를 수도 또 머물러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고 하신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그 끝을 맡겨드리면서 우리는 수없이 길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사는 문제에만 집착해 있을 때,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셨습니다. 하지만 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보다, 일상적인 습관에 주저앉아 버리고, 더러는 자기 연민, 걱정과 근심, 성공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으로 삶에 대한 기쁨과 희열, 열정과 자유가 질식당하는 생활 속에 살아갑니다. 그래서인지 신앙적인 사고로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는 거꾸로 자신의 고집이나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교회의 신앙을 변질시켜나가거나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거룩함을 빙자한 영적인 합리화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며 희석되는 첫 발원(發願), 혹 서약(誓約)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그 길은 세상에서 말하는 자신의 대단한 자아 성취와는 전혀 다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안일해지려는 모습 속에서 오늘 전례의 독서와 복음 뿐 아니라, 화답송의 시편을 꿰뚫는 말씀 하나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미사전례 시작부터 입당송을 통해 그리고 화답송을 통해 나오는 내용입니다.

 

보소서,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나이다.”(히브 10,7; 시편 40,8.9)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 그러하셨듯이 복음의 마리아 또한 스스로를 종이라 칭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