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제506차 월례미사 강론(2021.3.28)2021-03-28 18:32
작성자 Level 9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시작으로 하여 부활 성야 미사까지의 한 주간을 성주간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이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의 생전에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과 행적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전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교회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표현하고 생활화하게 된 것이 바로 전례입니다.

그래서 성주간은 예수님의 위대한 구원사업을 이룩하신 때요, 교회 전례의 정점을 이루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아버지의 사랑을 조건 없이 신뢰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 사랑은 십자가의 신비 안에 계시되었고, 부활을 통해 입증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극도의 자기 낮춤으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헌신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로 현양되십니다.

이 성주간의 시작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그래서 수난 받고 죽음에 처할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을 기념하면서, 그분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극복될 것을 미리 깨닫고 있는 우리들이 새로운 임금으로 오시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 11,9-10)

 

옷 벗어 나귀의 발굽 아래 깔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소리 높여 부르던 사람들.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희망을 가져다 줄 장본인을 맞이하는 제자들과 군중의 환호소리는 하늘과 땅을 진동시켰습니다.

그러나 오늘 수난 복음(마르 14,1-15,47)은 그 뒷소문을 암울한 색조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환호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차디찬 법정에서 조롱을 받게 되었습니다. 희망에 들떠서 소리 높여 외치던 제자들과 군중은 냉혹한 현실에 부딪치자 서서히 그 본색을 드러내며, 이기적인 관람객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군중은 자신들이 배고파 굶주렸을 때 빵의 기적으로 주린 배를 채웠고, 병들었을 때는 치유기적을 받았으며, 자신의 죄로 인해 신음할 때는 용서의 은혜를 받았건만, 이제는 그 은혜를 저버리고 철면피한 못된 본성의 호기심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시험해보기 위해 서슬 퍼런 살기를 띠웁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바쳐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목숨까지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제자들도(14,31), 이제는 자기의 신분이 혹시라도 노출되어 발각될까 봐 군중 속에 숨어 지금 우리와 똑같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라고 묻는 빌라도의 물음에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대답합니다(15,2). 빌라도는 예수님께로부터 아무런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했고, 경험상으로 또는 본능적으로 수석사제들의 시기 때문에 끌려왔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15,10). 그러나 냉혹한 정치인인 그에게 예수님의 유무죄를 다루는 사법 정의는 최우선적인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조작된 여론에 놀아나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외쳐대는 군중을 보며 빌라도는 곧 소동이 일어날 것 같은 군중을 달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결국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내줍니다(15,15).

종교와 정치 세계에서 이해관계는 달랐지만 유다인 최고의회와 로마 제국을 대리하는 총독은 기존의 권력 체제를 확고하게 지키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공통적인 속셈으로 이 둘이 손을 잡음으로써 하느님의 정의는 철저히 외면당합니다. 당신을 둘러싼 이 소동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침묵으로 물끄러미 그런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미 최고 의회에서 참석자들과 하인들에게 조롱을 받으신(14,65) 예수님께서는 이제 총독 관저의 뜰에서 로마 군사들에 의해 매질 당하고 조롱을 받습니다. 이들이 보기에도 초라하고 국가반역의 능력이 없어 보이자 침을 뱉고 비아냥거리며 마치 패배한 임금에게 하듯 무릎을 끓고 엎드려 경배하며 조롱해 대고 수치와 모욕을 주고는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갑니다(15,20).

 

여기 오늘 구약의 첫 번째 독서에서는 온갖 수난과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된 역사를 겪어온 히브리 노예들을 조상으로 둔 민족의 노래 하나가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 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이사 50,5-6)

 

모두에게서 버림받는 예수님께서는 시편구절(시편 22,2)을 통해 하느님께 온전한 신뢰로 생을 마감하고 계십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15,34)

 

참으로 하느님을 죽을 때까지 사랑한 사람만이, 자신의 십자가를 끝까지 짊어진 사람의 입에서만 나오는 단말마의 외침소리입니다. 이것은 평소에는 하느님에 대해 생각조차 안 하며 자기 뱃속만 믿고 이해 관계 속에서만 파묻혀 살다가 갑자기 어려움에 처하니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있느냐며 하느님께 원망해대는 우리의 궁색하고 궁핍한 불평과 변명이나 단순한 원망차원을 뛰어넘은 탄원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 안에서 아무런 죄 없이 자라오신 예수님, 진정 하느님의 나라와 아버지의 영광만을 위해서만 살아온 분이었기에, 참으로 깨끗한 제물이 되셨고,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인간을 위한 사랑으로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십자가상 죽음이었기에, 이방인 백인대장의 입에서조차도,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라는 고백을 들으십니다.

우리는 일찍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성지가지를 들고 소리 높여 예수님을 찬양했던 제자들과 이스라엘의 군중처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써 그리스도를 우리의 임금이자 스승으로 모시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들의 매일의 생활규범으로 삼고 충실하게 살아갈 것을 하느님께 서약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며, 마음만으로는 하느님을 떠난 적이 없다고 말하기는 쉬울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더불어 산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구나 어려움과 고통 자체는 싫어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결과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내게 닥친 고통과 슬픔이 어디서 왔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짐작조차 못합니다.

더러는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와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고독한 광야의 외로움 속에서, 가난의 서러움과 병고에 시달리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무겁고 힘든 십자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약한 우리는 그래서 신앙인으로서 이마에 십자가를 그으면서도 그 십자가를 피해보려고, 또 나의 삶에서 오는 십자가를 피해보려고 치졸하리만큼 잔꾀를 부리며 불신과 배신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할 뿐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셔서 친히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고난을 겪고 우리와 함께 죽으심으로써, 당신께서는 우리의 십자가를 없애러 오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일깨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삶의 새로운 의미를 터득해야 합니다. 인간은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이 지금껏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왔는지 그 허와 실을 깨달을 수 있으며, 현실적인 이해타산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삶에 있어서 소중한 것이 무엇이고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수난과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통해서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자기를 버리고 순수한 자신으로 돌아가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이 고작 자신의 삶의 십자가를 피하고 복이나 받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삶의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써, 이기적인 자신을 죽이고 이해 타산적인 자신을 버림으로써 순수한 자신으로 돌아가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남에게만 떠넘기며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이권에 개입된 일에만 전념하며 공동으로 져야 할 짐과 남의 어려움에는 무관심한 이기적인 부류의 사람도 있으며, 자신도 어렵지만 남의 어려움을 보고 그냥 나 몰라라 하지 못하는 진솔하고 풋풋한 인간미를 지닌 부류의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로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습니다(필리 2,6-11). 바오로 사도께서는 당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가장 힘들었을 때 자신을 도와 준 필리피 신도들에 대해 고마움의 뜻을 전하려고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면서도 필리피 교회 공동체 안에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고 남에게만 떠넘기려거나 자신의 이권에만 얽혀 사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인해 화목과 일치를 위협하는 요소들을 아파하신 듯 합니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께서는 필리피 신도들에게 사랑이신 하느님의 뜻에 죽기까지 헌신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제시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