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제506차 월례 평의회 훈화(2021.3.28)2021-03-29 07:22
작성자 Level 10

  영적독서: 제14장 쁘레시디움(교본 132쪽 1-2항. 132쪽 4-16줄)


  레지오 마리애의 기본 단위 조직은 쁘레시디움(Praesidium)이다. 이 명칭은 라틴말로서 특수 임무를 수행하던 로마 군단의 파견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전방의 한 분대, 요새(要塞)로 쓰는 진지, 수비대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쁘레시디움이란 용어는 레지오 마리애의 기초 조직을 가리키기에 적합한 말이다.

  쁘레시디움의 이름을 지을 때는 ‘자비의 모후’처럼 성모님의 칭호를 따를 수도 있고, ‘원죄 없으신 잉태’와 같이 성모님의 특전을 드러내거나 또는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처럼 성모님의 행적을 가리키는 말에서 따올 수도 있다.

  호칭 기도 안에 들어 있는 성모님의 칭호만큼 많은 쁘레시디움의 레지오 단원들이 자신의 교구 내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주교의 마음은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훈화 주제: 쁘레시디움의 명칭과 성모 호칭


1. 쁘레시디움의 명칭 또는 호도

  세계 최초의 쁘레시디움은 여성으로 구성되어 1921년 9월에 자비의 모후회(Our Lady of Mercy)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고, 두 번째에서 네 번째까지 생긴 쁘레시디움의 명칭은 원죄없으신 잉태(Immaculate Conception), 성모 성심(Our Lady of the Sacred Heart), 죄인들의 피난처(Refuge of Sinners)이며, 세계 최초의 남성 쁘레시디움은 1929년 12월 샛별(Morning Star)이란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각 쁘레시디움의 명칭은 주로‘평화의 모후’, ‘사도들의 모후’처럼 성모님의 호칭을 따서 짓는다. 이외에도 ‘원죄없으신 잉태’, ‘성모 승천’처럼 성모님의 특전을 나타내거나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처럼 성모님의 행적을 가리키는 말로도 이름을 지을 수 있다. 그런데 가끔 쁘레시디움이나 꾸리아의 명칭을 잘못 짓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사도들의 모후’, ‘순교자들의 모후’여야 하는데 단수를 사용하여 ‘사도의 모후’, ‘순교자의 모후’로 짓는 경우이다. 이 경우 병자들, 죄인들, 신자들, 천사들, 예언자들, 증거자들, 동정녀들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에겐 반드시 복수에다 모후를 붙여야 한다. 또 어떤 쁘레시디움은 성모님의 호칭인 ‘샛별’이나 ‘상아탑’에 모후를 붙여 ‘샛별의 모후’, ‘상아탑의 모후’로 사용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성모님의 호칭들을 정확히 알려면 가톨릭 기도서의 ‘성모 호칭 기도’를 참조하면 된다(교본 해설집 97-98쪽 참조).


2. 성모 호칭기도

  레지오 마리애 주회합을 비롯해 일상 신앙생활 안에서 널리 사용하는 성모 호칭기도(Litaniae Beatae Mariae Virginis)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1) 유래

  교회 안에서 호칭기도(Litania)는 아주 오래된 기도 중 하나로 동방교회의 ‘기리에(Kyrie)’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 기도가 5세기경에 로마에 전해지면서 많은 신자들이 선호했고, 그래서인지 중세에는 수많은 호칭기도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로마에서 사용되던 전형적인 호칭기도 형태는 ‘모든 성인의 호칭기도’였다. 학자들에 따르면 ‘성모 호칭기도’는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모든 성인의 호칭기도’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던 호칭과 청원의 수가 늘어나면서 12세기 경부터는 성모 마리아 호칭들만 단독으로 분리되어 독립된 기도가 생겨났다. 성모 호칭기도는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며 성모님의 여러 가지 호칭들을 붙여 기도하는 탄원기도인데, 이는 성모신심의 발전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 제일 유명한 성모 호칭기도가 로레토(Loreto)의 성모 호칭기도이다. 로레토의 성모 호칭기도는, 하느님께서 역사하신 인류 구원의 역사 속에서, 성모님께서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이루어내신 역할을 떠올리며, 성모님의 모든 호칭을 언급하며, 찬미드리는 기도문이다. 이탈리아 중부 로레토에 있는 산타 카사 성당에서 성모님을 기리기 위하여, ​토요일마다 이 기도가 바쳐졌는데, 이 성모성지(로레토)를 방문한 수많은 순례자들이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 기도문을 알리게 됐고, 그로 인해 성모 호칭기도는 유럽 전역에 퍼졌다. 급기야 1587년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이 기도문이 정식 인준을 받기에 이르렀다.

  로레토의 성모 호칭기도에 사용되고 있는 성모님의 호칭들은, 그 대다수가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문구이며, 성모 마리아의 삶을 표현한 예언적이며 상징적인 문구들을 인용하고 있다. 로레토의 성모 호칭기도와 비슷한 호칭기도들이 12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13-14세기에는 그 기도문의 수가 매우 많아졌다.

  성모님께 대한 호칭들은 원래 15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덧붙여지거나 삭제되기도 했으며 그중 5개의 호칭은 비교적 최근에 추가된 것이다. 그 예로 ‘묵주기도의 모후’와 ‘원죄없이 잉태되신 모후’란 호칭은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로레토의 성모 호칭기도에 추가되었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당시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평화의 모후’라는 호칭이 추가되었고, 1950년에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모후’라는 호칭도 추가되었다. 가장 최근 1980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때 교황청 경신성사성에 의하여 ‘교회의 어머니’란 호칭이 추가되었다. 1997년 7월 5일에 새로 출판된 「가톨릭 기도서」의 성모 호칭기도에는 성모님에 관련된 50개의 호칭들이 언급된다.

  그런데 2020년 6월 20일 경신성사성의 서한에 이 ‘로레토의 성모 호칭 기도’에 다시 3개의 호칭기도를 추가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동년 추계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이를 승인하는 공문을 내렸다. 이 3개의 호칭기도가 “자비의 어머니(Mater misericordiae)”, “희망의 어머니(Mater spei)”, “이주민의 위로(Solacium migrantium)”인데, 이 추가된 호칭이 『가톨릭 기도서』가 재판되어 나올 때 반영하기로 했다.


2) 구성과 성격

  성모 호칭기도는 4가지 범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성모 마리아님”으로 시작되어 ‘어머니’, ‘동정녀’, ‘하느님의 어머니’ 등과 같은 20개의 성모 호칭들이 있다. 마리아의 품위를, 또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신앙인의 전형으로서 마리아의 탁월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② 구약의 예언과 상징들에 연결되어 있는 13개의 성모 호칭으로 ‘다윗의 망대’, ‘계약의 궤’ 등 구약의 예언과 상징과 연결된 호칭들이다.

  ③ 성모 마리아의 힘과 업적에 관한 호칭 4개로 ‘죄인의 피신처’, ‘근심하는 이의 위안’ 등과 같은 성모 마리아의 힘과 업적에 관한 칭호들이다.

  ④ 모후이시며 여왕으로서의 성모님의 특성을 부각하여 강조하고 있는 13개의 호칭들인데, ‘가정의 모후’, ‘평화의 모후’ 등을 들 수 있다.

  신학자들은 성모 호칭기도가 청원기도와 함께 ‘찬미가’ 성격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인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성인 호칭기도’와는 달리 ‘성모 호칭기도’는 마리아를 여러 이름으로 부르며 기도하는 것을 볼 때 찬미기도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신자들이 성모님의 호칭과 관련된 성경 말씀이나 공식・비공식 교의에서 알게 된 내용을 묵상한 결과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성모 호칭기도를 바치는 신앙인들은 먼저 마리아가 보여주신 모범적인 신앙의 자세나 실천하신 훌륭한 성덕을 본받고자 노력해야 한다. 성모 호칭기도를 그저 단순히 ‘중재기도’를 바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만 이해한다면,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중재자로 착각하거나 더러 기복신앙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3. 하느님 안에서 이름, 호칭을 갖는다는 의미

  1) 하느님의 이름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탈출 3,13)


파견받는 이가 파견하는 신을 모른다면 그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신을 섬겼던 고대 근동 문화에서는 신의 이름으로 역할과 특성을 구분했다(예: 이집트 신들). 이름은 대상의 특성과 본질을 나타내고 대표하는 표지로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이름을 알면 그 신의 능력과 위치, 역할 등을 알게 되고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믿었다. 그래서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여쭙는 것은 그 이름 자체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은 “당신은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분의 이름을 알아야 관계를 맺어 예배드릴 수 있고 그분의 메시지를 신뢰할 수 있으며, 그분에게서 힘을 받아 그분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창세 32,20; 판관 13,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선언하신다. 성서학자들은 이 이름을 “나는 항상 있는 나다.”(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라는 표현으로 재구성하여 설명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3,14)고 하시면서 의도적으로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신다. ‘아쉐르’는 관계대명사이고, ‘에흐예’는 히브리어 동사 ‘하야’(있다, ~이다, ~가 되다)에서 나왔다. 그래서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경은 이 단어를 ‘에고 에이미 호 온’으로 옮겨 ‘나는 있는 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 풀이했다. 이러한 풀이를 바탕으로, 필론 같은 유다인 철학자와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존재하시며 다른 존재처럼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신 분이라고 그 속성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렇게 추상적이고 고정된 철학 개념으로 풀이하는 것은 본래의 히브리어로 표현된 의미와는 다르다. 본래 이 표현은 사역형으로 창조주로서 ‘나는 (무엇을) 있게 하는 자’, 또는 미래형으로 해석해서 ‘나는 ~로 드러날 것이다’로 풀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 이름을 통해 자신을 인격적 존재로 드러내시며, 그분의 정체는 이제부터 당신이 하시는 행위와 사건들을 통해 드러나리라는 것이다(7,5; 10,2참조).

그렇다면 탈출기 3장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성조들의 하느님이라고 밝힌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그것은 ‘임마누엘(Immanuel)’이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혹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임마누엘은 모세 이래로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안에서 활동하셨고, 오늘날 우리 각자의 인생 안에서 활동하신다. 하느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고, 우리 곁에 계시는 분이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고생할 때 함께 계셨던 그분은 오늘날에도 역시 우리의 고통스런 삶에 함께 계신다. 히브리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신 그분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온갖 환난과 역경에서 구출하시는 분이다.


2) 성경 속에서 전해주는 이름의 의미

  성경 안에는 주 하느님과 만난 이후 그의 이름이 바뀐 경우가 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창세 17,5), 사라이에서 ‘사라’로(17,15), 야곱에서 ‘이스라엘’로(32,29), 시몬에서 ‘베드로’로(마태 16,17-18), 곧 ‘케파’로(요한 1,42), 사울에서 ‘바오로’로(사도 13,1-12), 그 이름이 갖는 의미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을 때 그 이름이 바뀌게 된다. 우리가 세속명 말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름 하나를 더 받게 되는데, 그 이름은 단순한 주보성인의 이름만은 아니다. 세례란 그저 죄를 씻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데 그 의미만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은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로 안내한다. 예수님은 세례로 인해 숨겨져 있던 사생활(私生活)에서 공생활(公生活)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 이름을 얻고 산다는 것도 이름 없는 신자로 숨어지내며 그저 이기적인 복이나 구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명을 수여받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쁘레시디움의 성모 호칭에 대한 나름의 이름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저 소속감이나 연대감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특별한 사도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3)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옥중 마지막 회유문

  올해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교황청에서 승인한 희년의 해를 지내고 있다. 오늘 우리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신자들에게 보낸 마지막 옥중서간의 내용 중에 의미심장한 내용들을 새겨 볼 필요가 있다. 피흘림의 박해가 없는 오늘이라 하더라도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황황한 시절을 맞은 우리더러 훌륭한 군사가 되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면 주회합조차 못하는 레지오 쁘레시디움 단원들이 자신이 소속된 쁘레시디움의 이름이 갖는 의미를 잊지 말기를 당부하시는 말씀 같기도 하다.


  “교우들 보아라. 천주 무시지시(無始之時)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配設)하시고, 그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慰藉)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태어나서 입교한 효험(效驗)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背主背恩)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得罪)하면 아니 남만 못하리.

  밭을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辛苦)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 이르러 곡식이 잘 되고 영글면, 마음의 땀 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요, 곡식이 영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 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 심판 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영근 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로 천국을 누릴 것이요, 만일 영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

  “이런 황황(遑遑)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德功)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구령사(事主救靈事)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修治)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하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 됨을 증언하며, …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矜憐)하실 때를 기다리라. …”

  “세상은 온갖 일이 막비주명(莫非主命 주님의 뜻 아닌 것이 없고)이요 막비주상주벌(莫非主賞主罰 주님께서 내리신 상이나 벌 아닌 것 없으니)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爲主 주님을 위하고)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