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Se. 주간회의 훈화(2021.4.7)2021-04-08 06:26
작성자 Level 9

-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독서와 복음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래서 교회의 전례는 우리 각자의 부활신앙을 돕기 위하여 40일간의 준비시기인 사순시기(四旬節)와 파스카의 성삼일뿐만 아니라, 부활 팔일 축제도 준비하였다. 나아가 50일간의 부활축제일도 제공하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일 년 내내 모든 일요일(52~53)을 부활 기념축일로 거행한다. 그러나 부활 축제일을 50일로 지내든, 일 년 내내 모든 일요일을 주님의 부활 기념일로 지내든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느냐?’ 하는 것이겠다.

부활시기 동안 전례는 첫째 독서를 구약이 아닌 사도행전에서 가져온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의 체험한 초기 사도들의 설교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안에 담겨있는 설교들 안에서 바로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지닌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게 된다. 그리고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기 위해 성경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그리고 부활 후 첫 공동체들 안에서 생생하게 활동하시는 주님의 생명이 지닌 힘도 알게 된다.

그래서 부활 기간 평일에 사도행전을 연속적으로 읽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생활에 미치는 열매와 효과를 살펴보며 그 똑같은 힘이 우리들 가운데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음으로 선포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부활 팔일 축제 기간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복음공동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부활신앙에 도달하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며, 이와 행보(行步)를 같이하여 우리의 부활신앙을 고무시켜야 할 것이다. 아울러 부활신앙을 고무시키는 방편으로 복음서가 보도하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련된 기사를 주의 깊게 따라갈 필요가 있다.

부활 팔일 축제 기간 동안 교회의 전례는 네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주님의 부활과 발현에 관한 말씀들을 전해준다. 그리고 부활 제2주간 월요일부터 성령강림대축일 직전인 부활 제7주간 토요일까지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얻게 되기를 희망하는 생명에 대한 주제로 일관된다. 그리고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이 이 부활절 기간 동안 계속적으로 봉독되는 독서인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생명의 책이라고 불리는 요한복음에서 선택된 말씀들이(요한 3, 6, 10, 12-16) 생명의 의미를 충만히 밝혀 줄 것이다. 이처럼 부활시기 50일 동안 듣게 되는 모든 복음은 비록 그것이 직접적으로 부활사건을 보도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의 부활신앙을 향하여 읽혀지고 이해되어야 한다.

마르코는 16.1-22, 마태오는 28,1-20, 루카는 24,1-53, 요한은 20,1-25에 각각 부활(승천)기사와 복음의 에필로그(마무리)를 적고 있다. 부활기사의 분량은 마르코복음(70년경)과 마태오복음(70~80년경)보다 루카복음(80년경)과 요한복음(90-100년경)이 더 길다. 복음서의 집필연대가 늦은 것일수록 비교적 많은 내용을 담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복음서 모두가 일관성을 보이고 있는 내용은 안식일 다음날, 즉 일요일 이른 새벽에 일찍부터 예수를 따라 다니던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고, 이 순간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사실상 부활신앙의 출발점인 것이다. 이를 토대로 각 복음서는 자기 나름의 부활신앙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를 고쳐 걷게 하셨고(루카 5,18-26), 다리 저는 이들을 제대로 걷게 하셨다(7,22). 이 치유는 하느님께서 오실 때 다리 저는 이들은 사슴처럼 뛰게 되리라”(이사 35,6)는 이사야 예언자가 언급한 구원의 때인 종말의 시기에나 이루어질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독서(사도 3,1-10)는 사도들이 최초로 행한 기적사건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 등장한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처럼 나중에 바오로 사도도 리스트라에서 태생 앉은뱅이를 걷게 했다(사도 14,8-10). 이러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던 하느님의 구원 권능이 지금 사도들을 통해서도 계속 작용하고 있다는 연속성을 드러낸다.

사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포스톨로스는 본래 어떤 사명을 위임받아 파견된 자라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도직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류를 구원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넘치게 해 주시려고(요한 10,10) 세상에 파견되신 자신의 신원과 사명을 한시도 잊지 않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보내신 분의 뜻에 순종하여 헌신하셨기 때문이다.

2차 바티칸공의회는 세상의 구원과 복음화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근본 사명이자 사도직이라고 밝혔다(평신도 교령 2). 그래서 사도행전은 세계화와 종교 다원 사회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자기 신원과 뿌리, 사명의 근원과 방향을 깨우쳐 준다. 현대 세계에서도 여전히 구원계획을 실현해 가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식별하고 그것에 적극 응답하라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에서 복음을 증언하는 일상이 그리스도인이 고유하게 써 가야 하는 자신만의 사도행전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루카 24,13-35)이다. 이 이야기는 그 소박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로 인해 문학적으로도 걸작이 되고 있다. 루카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려 했을까? 성경 본문에는 삶의 자리가 있다고 했다. 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이야기 안에는 그 이야기가 쓰여질 무렵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했는지 전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하시는데, 일상생활의 한 가운데서는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기 어렵다는 것. 하지만 이와는 달리 성경 말씀을 대할 때 그분의 현존을 감지하고, 성체를 받아 모실 때는 더욱더 그 현존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오관으로 포착할 수 없는 주님의 현존이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려는 순간,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24,31) 결국 이렇게 본다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던 이야기는 예수님의 현존에 대한 체험담이라고 하겠다.

알다’(24,32)라는 히브리어 말 단순히 추상적인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식을 넘어서는 하나의 실존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구체적인 체험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라고 할 때도 사용되는 말이다. 그래서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현존과 부활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가 단순히 이론이나 성경말씀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취하신다. 당신에 관한 성경말씀을 설명하시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일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의 이야기는 우리가 참석하고 있는 미사 전례와 똑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처음에는 성경말씀이 봉독이 되고 강론이 따르는데, 이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설명해주며 제자들의 공허한 마음에 열기를 불어넣어 주며 뜨겁게 만들어 주는 부분에 해당이 된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주의 만찬이 거행되는데, 이는 꼭 엠마오라는 마을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은 부분에 해당이 된다.

결국 말씀의 전례로 신앙을 북돋우고 열정을 불러일으킨 뒤에 성찬의 전례에서 빵을 떼어줄 때야 비로소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 이 두 가지는 교회에 주어진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루어지는 가운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형성되어 가는 것이며, 이 두 가지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다.

 

지금 이 두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엠마오로 맥없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24,13).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수치스러운 십자가상 죽음 때문에 허탈과 절망감에 빠져 있다. 이들은 자기들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그 정도로 무기력해 보였다는 데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더욱 더 부끄러웠던 것은 그렇게 무기력하고 형편없는 예수를 지금까지 뭐가 그렇게 좋아서 따랐는지 이해가 안 되었고, 그러한 자신들을 용납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우리도 이 두 제자처럼 인생을 체념과 타성으로 힘없는 다리를 이끌고 맥없이 터벅터벅 걷고 있는 때가 있다. 더러는 실직으로, 더러는 사업의 실패로, 때로는 질병과 가정의 불화로 외롭고 쓸쓸한 먼 길을, 가파른 언덕과 험준한 골짜기를 걸으면서, 함정에 빠지고 자기가 지금까지 바랐던 것이 깨져버린 지금, 여태껏 의지해 왔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절망감과 또 그렇게 되기까지 아둔했던, 좀 더 약삭빠르지 못했던 자신에게 분노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더러는 신자라는 사실에 수치스러움과 절망감 내지는 실망만을 맛 본 이들이 교회 공동체로부터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가 곧 냉담에 떨어지듯이.

아직도 예수님께 집착과 미련을 가지고 있었던 제자들은 예루살렘 공동체에 남아 있었고, 그 공동체에 실망과 쓰라림을 맛 본 이 두 제자들은 이 예루살렘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엠마오로 향한다. 맥없이 터벅터벅 걷는데 누군가 곁에 와서 함께 걷기 시작한다. 복음서는 이들이 눈이 가려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전한다(24,15-16). 아마도 이 제자들은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의 모습에 실망을 느껴서, 아니면 자신의 일상생활 속의 고뇌가 너무도 커서 성당에 와서도 별 느낌이 없는 사람들처럼, 또 미사가 진행되는데도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처럼 무감각하게 대화를 나눈다.

대화중에 이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얼마나 어리석고 둔한 마음을 가졌느냐고 책망을 듣는다(24,25). 예수님은 성경을 예로 들면서 우리의 신앙에 장애요소가 되는 생각들을 제거해주신다.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다시 활동하신다는 것, 결국 당신의 죽음은 버림받음도, 절망도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요, 세상의 부조리와 악함 앞에서 무기력함을 증명해 보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구약의 고난과 시련의 의미를 설명해 주실 수 있는 분은 바로 지금 부활하여 우리와 함께 걸어주시는 예수님 자신이시다. 왜냐하면 바로 그 분 안에서 구약의 의미가 당신의 부활로 완성이 되었기 때문이다(24,26-27). 예수님께서 성경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계획과 뜻을 이렇게 설명하시는 것을 들었을 때, 이들의 마음 안으로부터 무언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24,32). 아울러 희망도 다시 불붙게 되었다. 우리의 십자가는 세상 안에서 무기력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체험은 자기들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걸으면서 우리도 똑같이 안고 살아가는 내적이고 영적인 신앙의 여정을 보여준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는 실의에 빠져 예수님께 관한 단편적인 기억조차도 깡그리 지우려했던 제자 둘을 오히려 부활의 증인(24,33-35)이 되게 한 사건이다. 이는 절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를 희망과 확신의 제자로 돌려 세운 과정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 안에서 제자들이 부활체험에 이르도록 도와준 매개체가 있다면, 예수님과의 대화, 성경 말씀 그리고 빵을 나눈 것이다. 이 셋을 살짝 달리 표현한다면 기도(祈禱), 말씀을 통한 삶의 복음적 비전, 성찬례(聖餐禮)로 종합된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방법도 이 셋을 피해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이 세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자동적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여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예수께서 이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의 만남에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미사성제는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전례를 통해서 함께 나누는 친교의식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부활의 신비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교회 공동체와의 관계공동체와의 친교를 나누는 성찬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교회와의 공적인 관계가 예수님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은 신앙조차도 교회 공동체와의 관계보다는 점점 개인화되어 가거나 내밀한 비밀 집단의 성격으로 변질되어 가려는 위기에 앞서 우리 신앙인들이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할 또 하나의 교훈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