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Se.주간회의 훈화(2021.6.23)2021-06-25 09:10
작성자 Level 9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 아브람의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과 계약/거짓예언자에 대한 식별 -

 

 

창세기 15장은 후손의 약속(1-6)과 땅의 약속(7-21)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이야기가 기록될 때 이스라엘 백성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아브람을 통해 하느님께 많은 후손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그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었기 때문이다.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그들은 민족 말살이라는 심각한 위기를 느꼈다.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패망 당한 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주셨던 땅을 떠나 바빌론이라는 곳으로 끌려와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처지였다.

모든 것을 잃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 미래의 안정된 삶에 대한 희망이 별로 없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식을 낳으면 자식의 삶이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 자식을 많이 낳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출산율이 매우 낮아졌다. 급기야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손이 번성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임을 강조하여, 그곳에 정착해서 결혼도 하고 자식들을 많이 나으라고 했다(예레 29,4-6). 유배자들은 출산율 저하로 인해 백성의 일부가 서서히 사라져 가지 않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하며, 조국을 잃은 아픔 때문에 번성하기를 포기한다면,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 백성의 존재 자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셨다.”(15,6)는 구절에서 특별히 아브람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오늘 독서인 창세기 15장이 쓰여지고 있던 시대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창세기는 옛날에 성조 아브람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상기하면서 아브람이 하느님을 철저히 믿었다는 성찰을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 6절의 표현은 아브람 시대에 있었던 일을 글자 그대로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창세기 15장이 기록되던 바빌론 유배시대에 과거 아브람에게 있었던 일을 신학적으로 다시 해석하여 기록한 말이다. 여기서 믿음을 특히 강조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보기를 제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백성의 미래에 관한 하느님의 약속을 크게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만약 하느님이 성조 아브람에게 해주신 약속이 옳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생활을 하지 않고 지금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남의 나라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창세기는 하늘의 별들처럼 많은 후손이 있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다시 한 번 상기 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심어 주려 한다.

창세기의 저자는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 내고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백성에게 하느님의 창조활동을 바라보게 하면서 용기를 잃지 말고 굳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창세기 15장에 기록된 아브람의 이야기는 유배를 살던 사람들의 생각이 첨가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성조들보다 훨씬 더 나중에 살았던 사람들이 자기네 사고방식으로 성조들 이야기와 고대의 약속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음을 아는 일이다. 신앙 공동체는 성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조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약속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자신들의 삶의 상황을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읽는 성경본문에는 본래의 이야기와 나중 사람들의 해석이 한데 섞여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세대의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다. 우리가 읽는 성조들의 이야기에는 고대인들의 해석도 포함되어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도 성조들의 이야기에 직접 참여하는 동시에, 그들이 걸었던 길을 계속 걷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는 단순히 씌여진 말씀으로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맞추어 해석하고 해석한 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읽는다면 그 삶의 자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저 아브람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믿어라 그러면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묵상을 끝낸다면 성경의 말씀은 그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인 삶의 자리를 잃게 된다. 성경 말씀에는 물론 메시지가 담겨 있지만, 그 메시지가 나오게 된 삶의 자리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자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우리 한국 사회는 인간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또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출산율 저하를 지향하는 삶의 자리가 있다. 국가적인 경쟁력이라는 차원에서 많은 우려를 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오늘 독서를 다시 한번 읽기 시작한다면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이 창세기 15장의 일화에서는 고대 근동에서 종주국과 속국의 임금 사이에 맺는 동맹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통상 종주국 임금의 약속과 속국 임금의 맹세에서 속국의 임금이 불충할 경우에 내려지는 벌을 상징하는 동물들의 희생으로 저주를 시사한다. 계약을 맺을 때 동물을 반으로 잘랐기 때문에, 히브리어에서는 계약을 맺다계약을 자르다로 표현한다. 잘린 동물의 두 부분은 계약의 당사자들을 나타내고, 동물을 자르는 행위는 계약을 위반할 경우 이런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동물을 반으로 쪼개어 놓고 그 위를 지나가는 사람은 자신의 맹세를 어길 경우, 바로 그 동물처럼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맹세하신다. 결국 하느님의 맹세로써 아브람은 이미 약속의 땅을 차지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분 친히 아브람에 대한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맹세를 통해서 계약을 맺으시고, 주님께서 그 약속을 주도하시고 이 계약의 장래가 그분에게 달렸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어떤 서약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 서약을 완성시키는 것은 사실 자신의 반듯한 삶이 아니라 나의 삶 안에서 함께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처음 보는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즉시 그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의 삶과 행동을 보고 나서야 그의 말을 믿을 것인지 식별할 수 있다. 결국 그가 얼마나 말을 잘 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한 바를 얼마나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로 헌신 없는 종교를 꼽았다. 거의 모든 종교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 자비를 말하지만 헌신과 희생이 없다면 그 종교는 말잔치를 위한 집단에 불과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라는 단체, 교회라는 조직에 맹목적으로 충실한 것이, 바르고 깊은 신앙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번 주간에 읽게 되는 마태오복음은 공동체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오늘 예수님이 특별히 경계하고 있는 것은 거짓 예언자와 거짓 설교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도자까지도 해당이 된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분홍빛 꿈처럼 편한 길로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등장할 것이다. 어제 복음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고 힘쓰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거짓 예언자들은 그럴싸한 말로 행하기 쉬운 말만 늘어놓은 채 십자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거나 회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끄는 이들을 두고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7,15)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거짓 예언자들은 언뜻 보기에는 결코 굶주려 있는 잔인한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겉으로는 매우 점잖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나약함을 동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관해 사랑과 자비에 관한 주제에 대해 더 많이 강조할 것이고, 부담스러운 요구사항들에 대해서는 거의, 혹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위장술이 그토록 훌륭하고, 구별해내기가 매우 힘들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그들은 양떼들에게는 가장 큰 위협이 된다.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게 되는 것은 그들이 길러낸 그들의 제자들을 통해서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7,19) 그들이 낸 결과를 보고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아보라는 말씀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7,16)라는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그 열매가 너무 달라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가시나무는 작은 포도와 거의 비슷하게 생긴 작고 검은 열매를 맺는 갈매나무라는 가시나무이며, 엉겅퀴는 꽃이 필 때, 그 꽃을 약간 멀리서 보면 꼭 무화과 같이 보이기 때문에 잘못 보기가 쉽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착각하기 쉬운 예를 드시면서 겉으로 비슷한 점만 보고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혼동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예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하신다. 이 시대의 뛰어난 영성가였던 헨리 나웬 신부는 열매야말로 참사랑을 판가름하는 기준이요, 내용이라고 말했다. 이 열매는 그저 겉으로 보기에 탐스런 열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맛깔진 열매를 의미한다. 그러니 좋은 나무여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다. “향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난다.”는 말이 있다. 나무가 실하고 좋은 열매를 맺으면 좋은 나무임을 알 수 있듯이 사람도 역시 언행을 통해서 그 됨됨이가 드러나게 된다. 누구나 안에 담고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거짓 예언자들을 식별해내는 제일 중요한 것은 열매이겠지만, 또 다른 방법이 있다면 보통 세 가지이다. 이기주의자이다. 참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만 거짓 예언자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 가르치는 것보다 자기 이익이나 명성을 얻기 위해 가르친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뜻을 중요하게 여기고 선포하기보다는 자신의 학식이나 견해, 사상 따위를 전하고자 하는데 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 볼 때 혼란한 시기를 틈타 거짓 교사들이 많이 나타났던 점을 상기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어려울 때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간 거짓 교사들을 조심해야 한다. 쉽게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이 시대는 더욱 교묘하게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기술들이 발달해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강한 분별력의 은사가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기도생활이다.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은 사랑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며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길 힘과 분별력을 기르는 시간이다. 특히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성경 말씀을 읽지 않고서는 그것이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것인지 하느님의 뜻인지 도무지 식별이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