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제509차 월례미사 강론(2021.6.27)2021-06-29 10:32
작성자 Level 9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내용 구성이 샌드위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하게 앓고 있는 딸을 살려달라는 회당장의 간청을 들으시고 가던 도중에(마르 5,21-24), 엉뚱한 하혈병 여인을 치유하게 되고(5,25-34), 그 사이에 죽어버린 아이에게 생명을 다시 선사하는 소생기적(5,35-43)으로 마무리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딸이 죽음에 이르게 된 비통하고 심각한 처지에 있는 회당장에게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회당장에게 있어서 죽어가는 딸은 실로 시간을 다투는 초조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딸의 죽음을 눈앞에 둔 아버지 야이로의 조바심을 잘 아시면서도, 도중에 당신을 만진 사람을 찾느라 하혈하던 여인과 대면하여 시간을 허비하십니다. 사실 하혈병을 앓는 여인은 지금 막 죽어가는 회당장 딸과 견주어 보면 그 정도로 긴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에게도 동일한 관심을 표명하셨고 결코 그 여인을 모른 체 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것이 크든 작든 간에 모든 인간들의 문제들에 관심을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보잘것없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귀여겨듣고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관심을 보이시며 응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일의 단절이나 끊김’, ‘일의 중단에 대해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무한경쟁과 우선적 성취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다들 속도전에 쫓기듯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와 무관한 것들로 나의 일과 삶의 흐름이 끊기거나 방해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생활에서 방해를 받아서 하고 있는 일이 중단되거나 소중한 시간이 빼앗기는 점에 대해서는 심히 불쾌하고 짜증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더러는 적당한 합리적 타협과 정당성을 부여하고 지나더라도 뭔가 손해보는 것 같아 영 찝찝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보기에 별볼일없는 버림받은 이를 우선 선택하기 위해 일을 중단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 이렇게 불쑥 끼어든 불청객에 의해 뭔가 소중한 것들이 중단되는 것도 내게 부여된 하느님의 은총의 시간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하혈병 여인의 치유와 회당장 딸의 소생기적 이야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진실간절함입니다. 유다교의 회당장이었던 그는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죽어가는 딸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다 죽어가는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게 됩니다(5,22). 만약 야이로가 회당장의 신분이면서도 자신의 체면이나 지위만을 고집했다면 아마도 자신의 딸을 살려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혈병을 앓던 그 부인(5,25)도 고지식하게 정부정’(淨不淨)에 관한 율법의 규정(레위 15,19-30)만을 고수하여 자신을 부정한 여인이라 여겨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밖으로 나오길 꺼려 했더라면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남에게 부끄러워 말도 못 하는 하혈병을 앓는 여인이 병을 치유받으려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군중 틈을 헤쳐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고통 때문에 몸도 마음도 성하지 않던 한 여인은, 어떤 방식으로도 치유되지 못했던 자신을 예수님만큼은 낫게 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절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밀쳐 대는 군중의 단순한 호기심의 손길과는 달리 치유를 간절하게 원하는 손길을 알아차리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간절함 속에서 하느님을 갈망하는 한 인간의 진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문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하혈병을 앓는 여인이 끼어들었다는 점입니다. 이때 야이로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봅니다. 지금 당장 딸이 죽어가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한데, 누군가 끼어들어 시간을 지연시킨다면 그의 심사가 더 타들어갔으리라고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아울러 그 여인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해봅니다. 그 여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끼어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기 때문입니다(5,24.31).

회당장 야이로의 머리 속에는 예수님은 오직 내 소중한 딸만을 위해서 시간을 내셔야 했습니다. 사실 사람이 절박하면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이 전개되면서 감정이입이라는 묵상방법을 사용한다면, 그 안에 담긴 야이로 회당장의 심리상태가 충분히 공감되고도 남습니다. 복음서는 묘하게도 이러한 전개방법을 쓰면서도 그 안에 감추어진 회당장의 심리 흐름을 느끼게 해줍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안타깝고 답답하던 차에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5,35). 열두 해 동안 죽어 가던 여인의 삶에 생명이 선사되는 동안 지금 당장 살아 있던 다른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순간적으로 촉박을 다투던 야이로 회당장의 마음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체념의 마음이 들기보다는 그 여인에게로 모든 원망과 미움의 화살이 쏠렸을 것입니다. 사실 회당장의 안타깝고 초조한 마음은 바로 이런 불길한 상황이 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잘못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실날같은 희망조차도 삼켜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절박한 마음은 있겠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하면 불길한 상상이 끝내 적중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획기적인 별다른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조차도 두려워말고 신념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5,36) 우리는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경우 쉽사리 체념하고 희망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미 기정화된 사실들을 뒤엎는 소신을 가진다는 것은 주위 사람들의 빈정을 사거나 비웃음으로 와 닿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이렇게 잘못된 그 모든 책임과 이유들을 그렇게 노력해왔던 나 아닌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상식과 기정사실을 깨는 파격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의 틀을 깨는 것이요 기정화 된 틀을 깨는 것입니다. 달걀 껍질을 깨는 용기가 없다면 새 생명은 빛을 보지 못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회당장이나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치유받고자 하는 갈망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의사나 간호사라 할지라도 환자가 낫기를 포기하면 더 이상 손을 써볼 도리가 없다고 하지요. 그것은 육신의 치유 뿐 아니라 마음의 치유 또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고해성사를 예로 들어 봅시다. 하느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저 주일미사에 빠지고 남을 미워했다는 것밖에 죄가 없다는 깔짝거리는 내용의 고해가 아니라 부끄러움이고 체면이고 지위고 간에 우리 편에서 먼저 내면의 모든 것들을 다 들어내는 고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바로 그러한 믿음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우리는 죄 고해를 하는 순간조차도 너무도 부끄럽고 수치심 때문에 또는 체면 때문에 정말로 용서를 받아야 할 부분은 감추는 모고해는 하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몰래한 일들이 밝혀져 부끄러워하는 여인에게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34)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기정화 된 사실에 넋을 놓고 있는 야이로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5,36)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이 딸을 생각하는 부정(父情)과 하혈병을 앓고 있던 여인의 치유받고자 하는 갈망을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생각하시는지 연결지어 보면 좋을 듯합니다. 바로 그러한 믿음을 갖는 자만이 지위나 체면을 생각지 않고, 또한 이미 기정화된 주위의 시선과 의식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고 온전하고 철저한 자세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당장의 집에 모여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비웃었다”(5,40)고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비웃고 코웃음을 치더라도 야이로의 믿음은 죽은 그의 딸을 소생시켰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의 체면이나 부끄러움 때문에 마땅히 누려야 할 하느님의 은총을 코웃음치며 거부하고 있지는 않는지. 지금 당장 세례를 받으면 자신이 지금까지 늑장 부린 자존심이 우습게 보일 것 같아서 자꾸 언젠가는 세례받을 것이니 내버려 두라고 하는 남정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한 열망이었다면 과연 그렇게 주저하고만 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런 남정네들은 자신들이 가치 면에서 우습게 생각하고 있는 것과 지금 내가 간 창자 다 꺼내주고서라도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자신의 딸이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라던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능력을 확실히 믿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치유를 간절히 청했기에,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 소녀를 소생시키시는 소리를 듣습니다. “탈리타 쿰!”(5,41) 회당장은 이제 믿음 안에서 죽음까지 이겨 내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혈병 여인도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5,34)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신체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던 그녀의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하시고, 몸과 마음이 성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오늘 전례에 선정된 복음을 통해 우리 인간과는 달리 그 어느 누구라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하느님의 의지를 느껴봅니다. 그런 점에서 첫 번째 독서인 지혜서는 하느님의 창조 계획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도록 만드셨고,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지혜 1,13-14).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만물이 창조된 목적대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서도 인간은 본래 당신의 본성의 모습에 따라 불멸의 존재로 지어내셨기에(2,23), 우리 인간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시키시기 위해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심으로써 병자들을 고쳐 주셔서 본래의 모습대로 아름답게 하시고 생명을 되찾게 하십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그 어느 누구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며 그 어느 누구도 차별하시지 않으시고 우리가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신다는 점을 확인시켜주고 계십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를 통해 바오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서는 본래 부족함이 없이 충만하셨으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고 이로써 우리를 부유하게 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2코린 8,9). 이러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보다 더 궁핍한 이들에게 너그럽게 베풀 것을 권면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궁핍한 이들을 채워주기 위해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풍요로움에 대한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8,13-15). 그것은 곧, 인간은 하느님 본성에 따라 창조되었기에, 그 어느 누구라도 그분의 선하시고 아름다운 본성을 간직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야이로의 딸이 소생하는 현장을 허락하십니다(5,37). 이 제자들은 나중에 거룩한 변모의 산(9,2)과 죽음의 피땀을 쏟은 게쎄마니(14,33)에서도 스승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자들은 미구(未久)에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또 그 증인이 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께서 진정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을 선사하는 분임을 증명하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오직 믿음을 가진 자의 마음속에만 참 생명의 의미가 새겨질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29)에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이 미사를 통하여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지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 곁으로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시고 우리가 그 생명을 온전히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교황주일을 맞이하여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께서 이러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