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Se.서울Re.협의회 훈화(2021.7.7)2021-07-08 10:42
작성자 Level 9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독서와 복음

- 형제들의 갈등과 화해/사도직 활동과 예수님의 제자단 인선 기준 -

 

 

독서는 이제 요셉의 이야기를 전한다. 창세기에서 요셉의 이야기는 37-50장에 걸친 긴 내용이다.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이집트로 팔려 가지만,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지혜에 힘입어 그곳에서 재상이 된다. 온 땅에 기근이 들자 요셉의 형들은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내려간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시험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형들은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화해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의 특성은 우선 문학적 구성 면에서 앞의 선조 이야기와 구분이 된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이야기가 주로 단편적이고 독립된 민담들의 이야기로 엮어졌다면, 요셉 이야기는 마치 한 저자에 의해 주제와 흐름이 매우 정교하게 일관되게 구성된 단편소설 같은 문학작품이다. 그 극적인 구성으로 볼 때 오경 전체에서 가장 빼어나다.

주요한 모티브는 꿈과 기근이다. 특히 짝을 이루어 나오는 꿈은 요셉 자신(37)과 파라오의 신하(40), 파라오 자신(41)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연속적으로 엮으면서 상황을 바꾸는 중요한 모티브로 쓰인다. 여기에 유다와 타마르 이야기(38), 야곱의 유언과 축복(49) 같은 내용을 삽입해서 이야기의 긴장과 극적 효과를 높인다. 지리적 배경도 남다르다. 앞의 선조 이야기가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을 주 무대로 삼는다면, 요셉 이야기는 이집트를 배경으로 전개된다(39-41).

요셉 이야기는 다른 선조 이야기와 구별되는 것은 하느님 또는 그분의 사자가 직접 출현하거나 계시를 전하지만, 요셉은 하느님을 전혀 만나지 못한다. 아울러 하느님의 약속, 인명이나 지명 및 관습의 어원론적인 풀이, 성소나 제의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요셉 이야기에서 가장 큰 주제는 하느님의 약속이 아니라, 형제 관계의 갈등과 화해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숨어서 은밀하게 인간사를 이끄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그분은 인간들이 저지르는 악에서조차 선의 열매를 거두시며(50,20), 세상 사람들을 살리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이야기의 사건이 진행되는 중에는 그분의 존재와 그분의 힘이 작용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되돌아보면 그분께서 마련하신 일임을 깨닫게 된다.

앞선 선조 이야기의 핵심 주제가 땅, 후손, 약속, 계약이라면, 이러한 주제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구원사의 흐름을 준비한다. 곧 요셉을 통해 선조 야곱과 그 자손들이 이집트로 들어가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이들이 한 민족을 형성하여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될 그때를 준비한다. 결국 요셉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체험한 하느님, 드러나지는 않지만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구해주시고, 악의 세력이 움직이는 가운데서도 구원의지를 펼치시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이야기의 특성상 하느님의 계시보다는 요셉의 인간적 지혜를 부각시킴으로써 지혜문학적 요소가 다분히 반영되었다고 보기도 한다(40-41).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이 성장되는 인간으로, 야곱을 집념의 인간으로 본다면, 요셉을 현자로 보는 것이다.

오늘 전례의 독서(41; 42)요셉의 앞의 내용을 훌쩍 뛰어넘어 뒷부분을 전한다. 요셉은 이미 이집트에서 성공하여 재상이 되었고, 이집트뿐 아니라 인근 부족들의 기근을 해결해 가고 있을 때 이야기로 요셉과 형제들의 극적인 화해를 담은 이야기의 초입 부분이다. 아마도 전례 독서를 선정한 사람들의 의도에 따르면 앞선 선조들의 땅, 자손, 축복과는 사뭇 다른 형제와의 갈등과 화해를 풀어가는 절정 부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셉은 이미 파라오의 다음가는 권력을 지닌 자로 나타난다. 권력에는 창조적 권력과 파괴적 권력이 있다.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따라 생명이 살 수도, 파괴될 수도 있다. 관계가 회복될 수도, 깨어질 수도 있다. 창조적 권력은 공동체를 돌보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지만, 파괴적 권력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관계를 깨뜨려 버린다. 요셉이 자신의 직책을 가지고 형들을 밀어붙이면서 치밀하게 시험했던 것도 그저 그 위치에 힘과 권력을 가지게 되자 과거의 보복차원에서 행사한 것이 아니라, 창조적 권력을 행사하여 깨어진 가족 공동체의 화해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해는 죄를 범한 사람이 잘못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본격적인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과 참된 화해를 하려면 먼저 망각 속에 묻어두었던 잘못을 대면하고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요셉은 형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형들을 몰아치는 것이다.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애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주지 않았지.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거야.”(창세 42, 21)

화해에 대한 글을 쓴 예수회 신학자 슈라이터(Robert J. Schreiter)에 따르면 화해의 적절한 주체는 희생자이지 가해자가 아니다. 그리고 화해의 대상은 이미 가해진 폭력 행위가 아니라 그 가해자의 인간성이다.”라고 했다. 요셉의 경우도 깨어진 가족관계의 회복은 피해자인 요셉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그리고 요셉이 화해작업을 할 때 형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고 노예로 팔아버렸다는 행위에 초점을 맞는 것이 아니라 일그러지고 뒤틀려 있는 형들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들을 향한 요셉의 치밀한 시험도 요셉과 형들의 화해가 우발적으로 적당히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복음은 산상설교(5-7)에 이어 제시된 둘째 설교 모음(10)인 파견설교이다. 파견설교 안에는 열두 제자의 선발과 파견(10,1-15), 내적 외적으로 직면하게 될 분열과 박해(10,16-25), 파견과 박해라는 주제로 묶인 다양한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태오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이 지녀야 할 자세만이 아니라, 환대받거나 배척받았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계신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 일꾼들을 청하라고 하셨다(9,37-38). 그래서 보내 주신 일꾼들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도들이다. 갈릴래아를 무대로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하시던 예수님께서 이제 사람들을 당신 곁으로 부르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이 예수님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이 아니라 인간의 협조가 있어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 첫 구절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를 치유하는 권한을 주신다(10,1)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예수님이 주실 권한은 8-9장의 기적 이야기에 충분히 예시되어 있다. 예수님처럼 모든 고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수확하는 일을 계속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로서의 진정한 임무는 세상의 악한 세력에 항거하여 이를 물리치고, 병자와 노약자,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 등 세상의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베풀며, 길 잃은 양을 찾아 세상 끝까지라도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소홀히 하는 사도는 그에게서 이름만 남을 뿐 아무 의미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9,36). 그들은 육체적인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인 소외로 기가 꺾인 가엾은 양 떼였는데, 이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로 거두어들여야 할 대상이었다. 교회 내에서 사도직에 온전히 종사하거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려는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고쳐 주고 돌보아 주어야 할 수많은 사도직 활동의 대상이 그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거리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0장에 들어서면서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어떤 의도로 사도들을 선발하시려는지 앞선 내용들에서 이미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마태오의 산상설교(5-7)와 기적사화 집성문(8-9)을 읽었다. 그러니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또 이것들을 통해 예수님께 놀라움 이상의 믿음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 적어도 이 믿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르침과 행적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전파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사도(使徒)로 선발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단, 제자들의 공동체의 이름을 보니 좀 당혹스럽다. 순박하면서도 좀 덤벙대기 일쑤였던 베드로, 그는 시련과 위협이 닥치자 지레 겁을 먹고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다. 이른바 배신자이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폭풍의 아들들로 불리우며, 질투심과 명예욕이 강했을 뿐 아니라 다혈질적인 기질까지 보였다. 의심 많은 토마스, 그는 도무지 대충 대충이 믿으려 하지 않는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유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한 일종의 자객단의 무리였던 열혈당원시몬,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그는 로마제국과 지배자들 그리고 그 동조자들에 대항하여 무력투쟁, 곧 폭력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었으니, 유달리 불의를 보면 못 참았을 것이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품고 있었을 증오심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스승마저 배신하고 팔아먹은 이스가리옷 유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신의 같은 것을 무시하고 공동체의 공금을 사사로이 빼쓰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배신을 자행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로마 치하의 시세에 편승하여 동족들의 돈을 거두어가며 민족의 고혈을 짜냈던 더러운 세리, 마태오.

모두 인간적으로 다양한 성격과 기질을 지녔을 뿐 아니라 더러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못한 이들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과연 이들을 단합시키고, 결국은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이가 순교할 수 있게 했던 그 열정과 복음전파의 역군으로 만들었던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뽑으신 이유가 그들이 지니고 있을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그런 점에도 불구하고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인간적인 자질보다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보여준 끊임없는 신뢰와 용서, 그리고 사랑이었다.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이 힘들어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상사나 동료와의 관계 때문에 오는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고 한다. 사실 모든 고민이나 고뇌의 뿌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고 한다. 사람을 병들게 만드는 것도, 또 사람을 치유하는 것도 사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이다. 바로 신뢰받지 못하고 용서받았다는 체험이 없고 또한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는 주님께서 그들을 끊임없이 믿어주고 신뢰했기에 가능했다. 거기에는 특별한 자격이나 능력에 대한 인선의 기준이 없었다. 그들을 움직이게 했던 것은 바로 그들은 용서받았고 사랑받으며 끊임없이 신뢰받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들보다 오히려 평범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