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Se.주간회의 훈화(2021.7.21)2021-07-22 09:32
작성자 Level 9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독서: 척박한 광야 생활에서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양식을 대하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세 가지 윤리

복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말씀인 씨앗이 아니라 토양의 문제

 

 

탈출기는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기본계획을 알려주는 청사진 역할을 해준다. 성주간 전례, 성체성사의 기도문, 성체축일의 성무일도, 파스카 시기의 미사와 성무일도 등에 인용될 정도로 전례에서도 매우 중요한 연관성을 갖는다. 그것은 탈출기가 신약에서 이루어질 예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부들은 갈대바다를 건너는 것은 세례성사를, 모세의 중재 역할에서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은 현재 신자를,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은 세상에서의 고통과 시련,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동안의 불기둥은 우리를 지켜주는 하느님, 광야에서의 만나와 메추라기는 성체성사, 가나안은 천국을, 계약의 궤는 성모 마리아를 예표(豫表)한다고 했다.

탈출기는 성경의 다른 책들을 이해하는데도 매우 중요하다. 후대의 영감을 받은 성경 저자, 예언자, 역사가, 복음사가들은 이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무수히 다른 예들을 끌어다 비유(引喩)하고 있으며 또 이 사건들을 서로 명백히 비교해보는 대비(對比)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심지어 탈출기 안에 담고 있는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계약의 큰 신학적 효과를 이해하고 소화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예언자들과 지혜문학 저자들의 글은 물론, 복음과 바오로 서간의 많은 부분에 대한 참된 평가와 이해를 가질고 읽어나갈 수 없을 정도이다.

탈출기가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담고 있는 내용이라면,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을 지어 볼 수 있다. 전반부는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역사적인 체험을 담은 역사서술(1-18)이고, 후반부는 법률적인 구원에 대한 내용(19-40)으로 시나이 계약과 깨어진 계약의 갱신 그리고 전례지침과 그 실행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을 다루는 내용이다.

탈출기는 이집트 탈출에서 약속된 땅으로 가는 길이 곧장 연결되지 않는다.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 기간이 필요하고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약혼 기간이 필요하며 참된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련 기간을 거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안주해야 할 정착지가 아니라 일시적이나마 지나가야 할 공간이고 완전한 의미에서 새로운 신분, 곧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얻은 해방과 자유는 온전히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이들은 전혀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자유와 해방을 체험했다면, 이제부터는 그 은총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광야 체험은 새로 태어날 시간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련 기간 동안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은 하느님이 야훼, 주님이심을 철저히 믿고 그 하느님만을 따르는 것이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수련을 겪는 동안 줄곧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자주 잊는다는 점이다.

탈출기에 나오는 광야생활(15,22-18,27)은 하느님께서 이끄시고 돌보시는 삶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이르러 심각한 생존의 위기를 겪게 되는데, 그 유형은 세 가지이다. 무장한 적의 공격(17,8-16; 민수 21), 물 부족(15; 17; 민수 20), 양식의 부족(16; 민수 11)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위기 속에 깃든 가장 심각한 위험 요소는 백성을 이끄시는 하느님과 모세에 대한 불신과 불평, 그리고 우상 숭배(32; 민수 25)이다. 그 속에는 불안한 광야생활을 못 견디고 억압 속에서나마 기초 생존이 보장되었던 이집트를 그리워하며 되돌아가려는 욕구가 있다. 몸은 빠져 나왔지만, 마음과 정신은 여전히 이집트에 매여 있다.

탈출기에 나타나는 광야의 여정에서 이스라엘의 불평은 달리 도움을 받을 길 없는 어려운 처지에서 도와 달라는 정당한 불평이다. 이들은 아직 하느님의 뜻과 능력을 제대로 모르고, 그들과 하느님의 계약 관계가 성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부르짖음은 곧바로 응답을 받는다. 자유를 주신 하느님께서 자유로운 삶을 가로막는 근본 요인을 없애주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야는 두 얼굴을 지닌다. 생존에 부적합한 환경이라는 부정적 측면과 주 하느님을 체험해가는 긍정적인 측면이다. 불모의 땅 광야는 끊임없이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므로,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생명의 하느님만 찾으려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자비를 갈망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최적의 장소로 받아들여졌다.

오늘 독서는 탈출해 나와 첫 번째 위기를 겪었던 목마름의 시련과 해결이었던 15마라사건’(15,22-27)을 건너뛰고 두 번째의 위기인 16장 배고픔의 시련과 만나이야기(16,1-39)의 전반부(16,1-15)이다(전례독서는 한 가지 시련만을 전한다). 때는 이집트를 떠나 온 지 한 달째인 둘째 달 보름날이었다(16,1; 민수 33,3). 1-12절 사이에 불평이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나오기 때문에 이들의 불평이 극도에 이르렀음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에는 출애굽으로 인한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온전한 신뢰가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는 살아남으려는 갈구에서 나온 불평이기에,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적극 개입하여 해결하신다. 메추라기와 만나의 형태로 주어지는 양식을 그들과 함께 계시며 돌보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표상한다. 병행하는 민수기 11장과 비교해 보면, 탈출기는 메추라기가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한 하느님의 선물인 반면, 민수기에서는 고기를 탐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시는 저주의 산물로 나온다는 것이다. 아마도 전승자료가 달라서 오는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나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양식이기 때문에, 만나를 먹을 때는 세 가지 사항을 지켜야 했다(오늘 독서에는 나오지 않고 이어지는 내용이다.) 하나는, “저마다 먹을 만큼씩거두어 들이라는 명령이다(16,4.16). 두 번째 당부는, 먹고 남은 것을 아무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마라”(16,19)는 것이고, 세 번째 당부는, 여섯째 날에 이틀 분을 거두고 이레째 되는 날에 쉬라는 말씀이다(16,22-30).

이는 이집트를 탈출해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새로운 경제 윤리였다. 그 윤리의 핵심은 계급과 신분에 따라 소유의 격차가 심했던 이집트와는 달리, 모든 생명체가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보존하는 데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다. 또한 불확실한 미래에 인간의 제도나 재산 혹은 헛된 명예나 보상에 궁극적인 신뢰를 두지 말고 오직 하느님만 전적으로 신뢰할 것을 강조한다. ‘썩는 냄새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 속에서도 서로를 믿지 못하고, 나아가 새 물을 주시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악취이다.

끝으로 안식일에 자유를 누리도록 하시는 배려인데, 안식일은 피조물 일체의 삶이 하느님께 의존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날이다. 일의 쉼은 하느님의 주관과 지배에 대한 승복이다. 일을 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안식일에 오히려 더 큰 하느님의 돌보심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럴 때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오고 일체 만물은 선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신명기는 그 내용을 이렇게 밝힌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신명 8,3)

 

 

오늘 복음은 마태오의 총 다섯 개의 설교(5-7장 산상설교, 10장 파견설교, 13장 비유설교, 18장 공동체 설교, 24-25장 종말심판 설교) 중 세 번째인 비유설교에 해당된다. 비유설교에는 전부 7개의 비유와 그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다(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의 비유, 그물의 비유). 그 대상을 본다면 전반부 4개는 제자들을 포함한 군중을 향한 것이며, 후반부 3개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씨와 같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비유이다. 하느님의 말씀인 씨에는 좋은 씨와 나쁜 씨의 구별이 없다. 그러나 성장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그 씨가 떨어지는 땅의 종류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제한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씨뿌리는 사람의 이 비유 역시 예수님의 다른 비유와 마찬가지로 진지하고 순수하며 솔직한 마음으로 듣는 사람에게는 그 뜻이 명백하고 직설적이며 충격적이다.

13장의 비유설교의 주제는 거의 모두 하느님 나라와 그 신비에 관한 것이다. 7가지 비유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하느님 나라의 어느 한 측면을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주면서 하느님 나라의 특성과 성격을 상징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알려준다. '비유'란 이야기를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소재나 표현들이 사용되지만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원관념은 비유 뒤에 숨겨져 있다. 따라서 원관념을 꿰뚫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비유는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이사 55,10-11 참조).

하느님의 말씀은 이처럼 힘이 넘친다. 그러나 교만하고 건방지며 독선적이고 천박한 이들에게는 귓전으로 흘려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은 듣기는 들었으나 귀담아 들은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일부러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숨기고 몇몇 사람들에게만, 비밀로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청중이 하느님께 마음을 닫아버리고 진리를 외면한 까닭에 주님의 말씀이 전해주는 진의를 못 알아들은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9)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레지오 상급평의회에서 어떤 사항을 전달할 때 가급적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전달 과정에서 내용이 변질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본래의 전달되는 메시지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토양)들이 혹은 전달해주는 사람들이 자기들 멋대로 혹은 취사선택하거나 '애착'(愛着 Affectiones)이란 것이 작용해서 그렇지 않을까 한다. 애착이란 하느님께로 지향을 두고 살아가려는 영성생활을 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이 애착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소 정향된 창조의 질서를 깨는 무질서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애착은 단순히 자기 욕심 때문에 꼭 쥐고 놓지 않으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기가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거부하려는 본능적인 것들을 함께 포함하는 표현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지나친 욕심뿐 아니라 자신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 거부하고자 하는 취사선택의 기호 때문이다. 전달된 지시사항에 대한 이러한 반응은 온전히 레지오 단원으로 살아가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