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제511차 월례회의 훈화(2021.8.29)2021-08-29 15:48
작성자 Level 9

영적 독서: 14장 쁘레시디움 중 협조단원에 대한 내용(교본 1394-16) 

 

쁘레시디움이 주변에 굳건한 협조단원들을 조직하고 돌보는 것은 그 본질적인 의무이다. 우수한 장교의 지휘 아래 용감하고 완벽하게 훈련된 무장한 병사들의 충천하는 사기를 보라! 하지만 장병들의 용맹성만으로는 이 부대의 힘을 오랫동안 유지시킬 수 없다. 매일매일 탄약과 식량, 피복, 의료품 등 여러 가지 지원을 받아야만 한다. 만일 이런 지원이 끊어진다면, 아무리 훌륭한 군대라도 과연 며칠이나 전선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보급 부대와 전투 부대 사이의 관계는 협조단원과 쁘레시디움 사이의 관계와 같다. 협조단원은 레지오 조직의 한 부분이며, 협조단원이 없는 쁘레시디움은 불완전한 쁘레시디움이다. 협조단원을 돌보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회람을 만들어 돌리는 것만으로는 이 중요한 의무를 충실히 채우지 못한다.”

 

오늘 영적 훈화는 한국 레지오의 현실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홈페이지 지도신부 방 훈화방에 꾸준히 훈화한 내용을 올리는 이유도 말이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필요한 부분만 받아들이기도 하고, 말이란 표현에 따라 상처밖에 남는 게 없어서 무책임하고 내가 언제 그런 얘기 했느냐고 하거나 자칫 일부 내용을 확대하여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지도신부 입장에서 엄연히 교본에 있는 내용을 민감한 사안이라 피해가면서 몇몇 사람들의 눈치나 보는 그저 귀에 좋은 이야기나 한다면 건강한 레지오 마리애가 될 수 없다.

 

요즘 레지오 단원들의 걱정 중 하나는 단원들의 고령화에 있다고 한다. 단원들의 연령대가 점점 고령화 되어 가고 젊은층의 단원들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교황님께서 지난 725일을 노인과 조부모의 날로 제정하시면서 담화문을 내신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복음을 선포하고 손주들에게 전통을 전하는 과업에서 물러나는 나이란 없다고 하시며 노인의 소명은 뿌리를 지키는 것, 젊은이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것, 작은 이들을 돌보는 것이라면서 이를 결코 잊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상처 입은 사회를 되살리고 지원하는 데에 적극 참여해야”(모든 형제들, 77)하며, 이 새로운 체계를 지탱해 주는 세 가지 기둥들은 꿈, 기억, 기도라고 하신다.

교황님은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요엘 3,1)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세상의 미래는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하는 이러한 약속에 달려 있다고 하신다. 또한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는 것은 나이 든 모든 이의 참된 사명이라고 하신다. 아울러 전임자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노인들의 기도는 세상을 보호할 수 있고, 다른 많은 이들의 노고보다 어쩌면 더 통찰력 있게 세상을 도울 수 있다.”고 하신다.

 

예전에 신학교 영성지도를 6년을 하고 스스로 그만 둔 적이 있다. 학교에 들어 간 순간부터 자격과 능력에 대한 부분 때문에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을 줄곧 했던 터였다. 또한 나로 인해 불편한 마음으로 사제수업을 받는 학생들을 생각해 볼 때 영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의 효과는 교육의 내용보다 교육자의 인격을 절대로 넘어서지 못한다.” 이것이 오래된 교육학계의 불문율이다. 내 스스로 생각해보기에 긍정적인 부분보다는 인격적으로 사제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이지 못한다는 생각이 더 컷기 때문이다.

면담 때 주교님께서 왜 더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말씀 드렸던 것을 기억한다. “제게 부여된 지난 시간동안 저는 충분히 행복하게 살았고 게으름 안 부리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학생 중에는 내가 필요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가 존재함으로 인해 안 좋은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어떤 신부는 학교에 꼭 필요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더러는 저 인간은 제발 좀 나가주었으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의 신부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교구 내에는 훌륭한 신부들은 많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신발 끈을 풀어줄 자격조차 없는후배들이 많습니다. 이것 아니어도 교회 내에 제가 할 일은 많습니다.”

 

세상에는 떠남의 자유로움과 붙들고 있음의 옹색함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경우를 본다. 오랜동안 어느 직책에 있는 사람일수록 떠남의 기회를 놓치고 붙들고 있음이 추한 모습으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들일수록 그 가 언제인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를 놓친 사람은 떠나더라도 아름답지 않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지금껏 참고는 있었지만 앓는 이가 빠졌다느니 속 시원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혜로움은 식별과 선택을 잘 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인 것 같다. 식별과 선택이 고집스럽고 옹색하다면 추한 모습만 남는다. 그렇다고 내가 지극히 지혜롭고 잘 나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잘 선택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도는 그 사람의 품격과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주게 된다. 이는 자신이 드러내지 않아도 저절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삼투압 작용과도 같다. 말로만 자신은 기도를 많이 한다고 떠들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 영향력과 같다. 오히려 기도는 떠들면 떠들수록 추하게 보인다는 특성이 있다. 나의 경우는 어떤 한 장소와 직책에서 떠남으로 인해 그 전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된 경우이다. 레지오 소임을 맡으면서 더 많은 기도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전에는 일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더 많이 해주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어떤 이는 눈에 드러나 보이는 것만이 영광스럽고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행위는 남들 눈에 금방 띄기 때문에 쉽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어떤 이들은 이 조차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고 철저히 감추어지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덕행을 쌓아 나갈 뿐이다. 가끔 매스컴에 오르는 훌륭한 덕행의 소유자들도 있지만 이 조차도 기겁을 하면서 숨는 사람들이 있다. 기부금이나 후원자들 중에는 연말정산 때 환급 받기 위해 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익명으로 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기도는 남들이 인정해주지도 않고 드러나지도 않기 때문에 신앙인들에게조차 관심도 없고 정작 기도가 의무인데도 도무지 기도하는 사람(수도자나 성직자)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생각하기에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기도를 많이 하는 경우는 드물게 보인다. 오히려 기도는 신앙인으로서 나이 들어가면서 몸에 저절로 베어가는 특징이 있다. 그만큼 하느님께 한 발 더 가까이 근접해 간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지 6년이 된 제 어머니도 말년에는 거의 하루종일 기도만 하셨다. 무슨 기도를 하는지 물어 보면 대부분 자식들, 손주들, 젊은이들, 교회에 대한 것들이다. 나중에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모시고 살던 누님께서 늘 바치던 기도문 하나를 내게 전해 주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복된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였다.

신앙인으로서 나이는 들었는데 기도도 안 하면서 욕만 얻어먹고 낄 데 안 낄 데 다 다니면서 참견이나 하고 왕년의 나는 어떻게 살았는지 주입시키려고만 하며, 자신은 어디가서 연륜이나 노인으로서 대우나 받으려 할 때, 당연히 젊은 사람들은 기피하게 되고 따돌림을 주게 된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나를 기피하는 것이 자신의 그 잘난 꼰대 기질때문에 그렇다면 문제가 좀 심각한데, 중요한 것은 본인만 모른다는 것이다. 잘난 자신을 사람들이 몰라주고 젊은이들은 세상물정 몰라서 그렇다고만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종종 레지오에서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레지오 단원으로서 교육은 많이 받아 아는 것은 많은데 자신을 다스리는 훈련이 덜 된 단원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세상과 사회가 인정해주고 남들이 인정해준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된 것이라면 자신은 잘난 사람이고 영원히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영원히 살지 않는다. 체력에도 한계가 있고 능력도 주위에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역량을 살려주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정신력에도 한계가 있다. 요즘에 후배신부들과 만나서 얘기하다가 내가 무슨 입장을 얘기하면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싸~ 해지고 민망해하는 경우가 있어서 나중에 물어보면 분위기 파악 못해서 그런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나 없이도 얼마든지 일을 하실 수 있고, 당신이 원하신다면 나를 제쳐 놓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얼마든지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지, 하느님께서 나 없이는 당신의 구원사업을 못하실 분이 아니시다. 우리는 교회의 일조차 너무 세상 기준에 맞추려 하는 경향이 있다. 입으로는 교리와 영성 서적에서 읽은 몇몇 구절들을 토해놓으면서 정당화시키려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그 속이 뻔히 보인다.

레지오의 특징은 한번 레지오 단원이 되면 꽤 오래 간다는 데 있다. 변함이 없다. 속된 표현으로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그래서인지 레지오 단원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이 아직은 영예스러운 행동단원으로 남기를 원한다.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 협조단원으로 권고를 받으면 마치 인생이 끝장 난 것처럼 생각하며 그렇게 얘기한 사람에 대해 분노감과 노여움을 표현한다. 그런데 협조단원으로 사는 것이 그렇게 절망감을 주는 것일까?

레지오 단원들이 행동단원만 인정받는다면 그 레지오는 더 이상 인간들만의 조직체에 불과하다. 영적 힘을 받지 않고 활동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니 협조단원으로서의 역할이 빛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본에는 협조단원의 역할과 중요성을 꽤 많은 분량에 걸쳐 할애하고 있지만 자신이 협조단원이 된다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용납이 안 될 정도이고, 더러는 용서가 안 될 정도로 생각한다면 레지오 단원의 생각이 아니라 제 영화(榮華)를 위해 지금껏 활동했다는 것밖에 뭐가 되겠는가? 협조단원은 레지오 단원이나 모자라거나 결함있는 단원일까?

그런 의미에서 협조단원의 역할을 중요하다고 본다. 사회에서는 일만 잘 하고 성과만 있으면 되겠지만 교회 내의 일이란 꼭 그렇지 않다. 왜 그런지는 신자들, 특히 레지오 단원들이라면 더 잘 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주고 있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만이 감사의 마음과 자신이 이룬 일들이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오늘 읽은 영적 독서의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면 협조단원의 역할이 만만치 않다. 오히려 협조단원 없이는 레지오 조직에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한국 레지오에 현실적으로 보면 협조단원의 위상이란 보잘것없이 보인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냥 교본에서만 좋게 표현되어 있다.

행동단원이라고 활동만 하겠는가? 기도 공부 활동 이 세 가지 탄탄한 요소들이 조합되어야 건강한 행동단원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느 순간 식별과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평소에 기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그 식별을 잘 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기도일진데, 하느님의 뜻은 제쳐 놓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만 하는 사람이 과연 기도하는 사람이겠는가? 행동단원만 레지오 단원이고 협조단원은 레지오 단원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협조단원으로 적을 올려놓는 것이 그럴헤 억울하다면 그는 기본적으로 신앙인이라기보다는 지금껏 레지오도 제대로 모르고 지냈고, 레지오를 빙자한 특별한 거래일 수도 있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는 사도직뿐 아니라 신비체에 대한 내용이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각 지체마다 유기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신비체에 대한 내용이 무색해진다. 레지오 단원들이 말로는 협조단원의 중요성을 입에 올리면서도, 실제로는 레지오 조직 안에서 활동단원과 협조단원의 밀접하고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협조단원으로 있는 것이 레지오 단원으로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고 마치 인간 쓰레기라도 되는 양 생각하고 자신이 협조단원으로 있는 것이 치욕스럽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요즘 쏟아져 나오는 영성서적들 중에 노년의 영성에 대한 내용이 많다. 그것은 시대적 흐름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고령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노년을 아름답게 살자는 세상의 흐름이기도 한데, 신앙인에게도 영적으로 노년을 충만하게 해주는 내용들이 많다. 이런 내용들을 접하면서 영적으로 충만해지고 준비가 되지 않으면 갑자기 다가온 노년에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고, 그저 젊음을 지향하는 교회의 모습만 있을 뿐이다.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떠남이 자유롭고 신선한 것은 떠남과 동시에 일어나는 출발때문이었다. 반대로 붙들고 있음이 지속되는 한, 출발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것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어찌 보면 참혹한 일이기도 하다.

레지오 단원에게 나이 제한은 없다. 일단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충분히 누리면서 자유롭게 살 필요가 있다. 그러니 능력이 닿는 한 충분히 자유롭게 활동했으면 한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감지는 본인만이 식별하고 선택해야 한다. 꼭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필요는 없겠지만, 결국은 식별과 선택은 본인의 몫이고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할 몫이기도 하다. 그 지혜로움이 없다면 기도부대이자 영적인 지원부대라고 하는 협조단원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그리고 협조단원이 어디 노인층으로만 이루어진 그리스도 신비체의 구성인가? 성직자, 수도자도 포함되고 때에 따라서는 젊은 층에서도 협조단원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행동단원으로 활동하다가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얼마든지 협조단원으로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협조단원들은 실제 활동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기도를 바쳐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활동은 하면서 기도를 바치지 않는 행동단원보다는 기도를 많이 바치는 협조단원이 오히려 레지오의 모후께 더 큰 봉사를 드리고 있음이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은 레지오가 의도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반대가 된다. 왜냐하면, 레지오는 행동단원을 창끝으로 여기고, 협조단원은 단지 손잡이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협조단원들이 열성과 인내심을 가지고 기도를 바치는 것은,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이 희생하고 영웅적으로 봉사하는 행동단원들을 자신의 기도로써 뒷받침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런 또 하나의 이유 때문에라도 행동단원은 협조단원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며, 협조단원들에게 영신적인 자극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행동단원이 바치는 기도가 협조단원보다 적어서 어느 쪽이 레지오를 위해서 더 많이 봉사하는지 알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면, 어찌 협조단원들을 영신적으로 북돋아 주는 행동단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교본 306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