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제511차 월례미사 강론(2021.8.29)2021-09-01 08:19
작성자 Level 9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입니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더러는 짜증나게 하는 실질적인 문제 중 하나가 관례이자 관행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 관행이라는 것은 원래 있는 규정을 엿장수 맘대로 귀에 걸면 귀고리가 되고, 코에 걸면 코고리가 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엄연히 규정은 있으나 맡은 소관이 불분명해서 서로 떠넘기다 보면 되는 일도 없고, 또 그렇다고 해서 안 되는 일도 없는 단순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연출합니다. 이것이 규정을 따지면서도 담당자들의 교활한 논리에 의해 달리 적용되는, 규정보다 더 우위를 차지하는 관행이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내용은 제자들이 음식 먹기 전에 손 씻는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식사 전 손 씻기는 먼지가 유독 많은 팔레스티나 광야 기후의 이스라엘 땅에서 최소한의 위생적인 삶을 보장하려는 관습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정결법(淨潔法)과 관련지어 조상들의 전통으로 고정시켰고, 거기에 종교 권위까지 더해 놓았습니다. 율법에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율법 규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지 거룩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사제들이 예식을 거행하거나 제단에 다가갈 때 손과 발을 씻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탈출 30,17-21).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일반 신자들이 일상생활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사제들에게 요청되는 규정을 확대하여 적용시킵니다. 이들은 너희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20,7)는 요구에 정결법을 확대 해석한 것이고, ‘거룩하신 하느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것을 지향하여, 율법 규정을 철저히 지켜 삶의 모든 부분이 거룩해지도록 노력했습니다. 식사 때 손 씻는 예법은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모름지기 하느님의 계명은 문자화된 조문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신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계명의 정신이 아니라 쓰인 문자(율법)에 제 나름의 해석을 곁들여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한 세부 규정(Halakha)들을 만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조상들의 전통을 따른다는 것은 이 세부 규정들을 충실히 따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조상들의 전통은 수백 년을 내려온 가르침이며 이스라엘의 위대한 전통입니다. 그래서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백성을 오도(誤導)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전통이란 것이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를 근거로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이사 29,13)고 종교 지도자들을 비난하십니다. 말로는 주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으로는 경건치 못한 이들을 꾸짖는 내용입니다. 특히 조상들의 전통을 두고 사람의 전통이라 한 것이 인상적입니다(7,8).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거룩함을 존중하여 선의로 만든 전통이라 해도 하느님의 뜻이 담긴 계명과 결코 동등할 수는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종교 지도자들이 은연중에 이 둘을 대등하게 여기거나, 사람의 전통을 하느님의 계명에 대체시킨다고 비판하십니다(7,8-9). 예수님의 꾸짖음을 하느님의 계명과 인간의 해석에 대한 전향적 사고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로 수백 년 전통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전례의 첫 번째 독서인 신명기에서 모세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신명 4,2)고 명합니다. 모세는 여기서 내가 내리는명령과 하느님이 내리신명령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상의 전통하느님의 계명을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던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모세가 스스로를 절대자로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과 백성의 중개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명령이 모세 스스로 생각해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명령임을 소상하게 밝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태서도 빼서도 안 된다는 말씀은 율법의 자의적 해석과 적용을 금지하고 율법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 번이나 위대한 민족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자부심의 근거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주도권을 가지고 친밀하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가까이 모신 민족(4,7)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분이 주신 율법에 따라 사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4,8). 그러기에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께서 주신 규정과 법규를 잘 듣고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명기 정신의 핵심이자 목적입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들도 부러워하는 위대한 민족의 최고의 지혜는 하느님의 가르침, 곧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고백합니다(4,6). 율법을 지키지 못해 주님께서 주신 땅에서 쫓겨나 남의 나라 땅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백성에게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낙담하지 않도록 위로한 것도 바로 이 율법이었고, 하느님 백성의 참된 자긍심은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문화권이나 일정한 금기 사항은 존재하지만, 유다교에서 정결법은 거룩함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매우 중시됩니다. 1세기 유다교에서는 정결법을 폭넓게 적용했는데, 가장 자세하게 규정된 것이 음식 관련 규정입니다. 이들은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구분하여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을 규정했습니다(레위 11). 이 규정은 이방인들과 섞여 살던 유배생활에서는 철저하게 지켜야 할 자신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면서 율법 준수 문제로 마찰을 일으켰습니다. ‘깨끗한 음식과 더러운 음식의 구분’(사도 10,9-16; 11,5-10; 로마 14,13이하; 갈라 2,11-14),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문제’(1코린 8; 10)는 초대 교회에서 심각한 논란거리였습니다. 음식 규정이나 정결법은 단순한 규정이나 지침을 넘어서 지키는 이의 신앙과 신원까지 연결되는 주요 사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 당대에 이런 전통이 얼마나 잘 지켜졌을까요? 상대적으로 자기 토지가 있고 경제적으로 생활에 여유가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이야 이를 철저히 지켰겠지만, 생활고에 쫓기며 극히 고단하게 살았던 대다수 서민들은 이런 세칙을 다 알 수도, 지킬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느님 백성의 일상을 거룩하게하고 거룩한 백성의 일치를 높이려는 본래 지향과는 달리, 이런 율법 세칙은 무거운 짐이 되고(마태 23,4),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은연중에 차별하고 멸시하는 빌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시작하며 시비를 걸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정작 예수님에 대해 뭐라 한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기 전에 손 씻는 전통을 지키지 않은 제자들을 공격한 점이 눈에 띕니다. 도대체 어떻게 가르쳤기에 저 모양이냐는 비난을 빗대 표현한 것이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에 주목한 정결 규정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정결법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사안이지만, 그것은 음식을 먹는 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은 음식 때문에 더럽혀지지 않고 그에게서 나오는 나쁜 생각과 행실로 더럽혀진다고 하시며, 모든 음식은 깨끗하지만 모든 사람이 깨끗하지는 않다는 말씀을 하십니다(7,20). 사실 겉만 씻는 제의 행위로는 마음속의 악을 씻어낼 수는 없습니다. 악의 근원인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 곧 성령뿐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처음 제기한 문제는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는것이었습니다(7,5). 예수님께서는 그 주장의 근거인 사람의 전통에 대해 비판하신 다음, 다시 그 문제로 돌아가 입술과 마음을 들어 더러움과 깨끗함에 대해 가르치십니다(7,14-23). 예수님께서 꼽으신 악덕,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7,21-22)은 행위자의 마음과 의지를 반영하며, 이웃에게 해를 끼치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악입니다. 그러나 이 목록은 예시된 것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 상태입니다. 사람의 의지와 의사결정 능력의 중심인 마음이 완고하지는 않은지(3,5; 6,52 참조), 악의 지배를 받고 있지는 않은지 식별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율법의 근본 의도를 새롭게 밝히고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라고 촉구하시는 한편, 그 뜻을 왜곡하는 기존의 거룩한관습과 규칙과 전통을 거부하십니다. 율법에 충실하다 하여 악한 눈길로 이웃의 더러운 손을 비난하기보다, 그것마저 품으시는 하느님의 거룩한사랑을 깨달으라고 이르시는 듯합니다. 그러나 실로 경건의 탈을 쓴 불경건함을 식별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렵습니까?”(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며, 인간이 만들어 놓고 힘 있고 권위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의 해석에 따라 조작과 적용이 달라지는 형식적인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전통을 지켜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차별해대는 자존심과 아집과 교만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제시해주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참된 삶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독서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신명기에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신명 30,11)고 했습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30,14)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주어진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귀와 입맛에나 맛는 거짓 예언자들과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말에 현혹되어 무엇이 진실한 하느님의 말씀인지 헷갈리며 살았습니다. 정작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은 경청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참된 예언자들의 쓴 소리를 무시하고 배척하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그 땅에서 살 자격을 잃고 쫓겨나 남의 나라 땅에 가서야 때 늦은 말씀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독서를 통해 야고보 사도께서는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 1,21)고 하십니다. 우리의 온갖 훌륭한 은혜와 완전한 선물인 친절함과 사랑은 사람들의 관습이나 전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곧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1,17)이라고 하십니다.

속칭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2,17)이라 일갈(一喝)하셨던 야고보 사도께서는, 오늘도 한 주간에 고달프고 지친 몸을 이끌고 주님의 제단에 모여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라”(1,22)고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