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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1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담당 신부로 인사발령을 받은 서울대교구 이동훈 시몬 신부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제가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회합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지도신부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하게 되는 영적 훈화와 월례미사 때 강론을 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이곳에 접속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영적 교육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맡겨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여러분들을 위해 초를 봉헌할 것이고, 순례지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도를 이곳에 올려놓겠습니다.

제목월간 레지오 마리애 운영위원회 임시총회 마침미사 강론(2021.9.9)2021-09-10 10:08
작성자 Level 9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9.8)


교회헌장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전례 안에서 공경하라고 강조하고 있다(67). 이는 성모님만을 따로 떼어 기리자는 취지가 아니라 전례의 중심이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분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례 안에서 행하는 마리아 공경은 항상 강생육화에서부터 영광스러운 재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신비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2). 무엇보다도 전례 안에서 읽는 독서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다루고 있는 성경말씀들로 제시되어, 온전히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고,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25).

성경말씀이 전례 안으로 들어가면 전례요소들과 화합하여 조화를 이루어서 그날의 전례가 지향하게 되는 의미를 띠게 된다. 그래서 성모축일전례에 읽게 되는 독서 말씀들은 성모님을 일방적으로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안고 있는 구세사 안에서의 메시지를 지향하게 된다. 이러한 말씀과 전례의 조화는 강론을 통해 표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 바오로 6세께서도 회칙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1974)을 내시면서 신자들은 1차적으로 전례 안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사적인 차원에서 성모공경에 관하여 지나친 마음의 협소함이나 거짓 과장을 피하기를 호소하고 있다. 전례는 다른 모든 사적 신심이나 예배의 탁월한 모범이며(1), 교의적 내용을 풍부하게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사목적으로도 큰 효과를 지니기 때문이다.

 

교회 초세기부터 대략 7세기까지 성모신심으로 지냈던 중요한 네 성모축일들이 있었다. 성모승천(8.15), 마리아 탄생축일(9.8), 취결례 혹 주의 봉헌(2.2), 성모영보(3.25). 네 축일들 중 으뜸가는 두 개 축일이 22일과 815일의 축일이었다. 원래 교회의 전례력에서 탄생을 기념하는 경우는 드물다.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전부이다. 이 성모 탄생 축일은 성모승천대축일보다는 덜 성대하게 지내지만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는 이 축일이 세례자 요한의 탄생축일과 동등한 기쁨의 축일이다. 이 두 축일은 두 인물 자체의 탄생을 기린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구세사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이 두 인물은 구원의 서광을 선포한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은 교회에서 어떻게 생겨나 지내게 되었을까? 성경에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대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톨릭 신학과 교의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야고보 원복음서나 몇몇 외경에서 전하고 있다. 특히 야고보 원복음서는 전체가 마리아를 높이기 위해 쓰여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복음서가 후대 마리아론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마태오와 루카복음도 마리아와 요셉에게 관심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는 예수님과 이스라엘과 다윗 가문과의 관계를 보여 주기 위해서일 뿐이다. 야고보 원복음서에서는 마리아와 요셉이 주인공이고 마리아의 부모와 마리아의 탄생까지 이야기가 확장되며 출산 후 동정성을 선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야고보 원복음서가 마리아와 요셉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는 신학적 이유가 있다. 먼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므로 요셉이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신학적 당위성을 결부시키는 문제이다.

초대교회부터 성모신심이 계속 되었지만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은 동방 전례에서부터 지내기 시작했던 것이 서방의 로마전례로 넘어오게 되었다. 5세기 초 예루살렘 성전 북쪽의 양의 문근처에 있는, 베짜타의 병자치유(요한 5,1-19)가 일어났던 연못 위에 한 성당이 세워졌는데, 한 세기가 흐른 다음 마리아 탄생 기념을 이 장소에서 지내게 되었고, 그 후 이 교회가 마리아 탄생 기념 성당이 되었고 이것이 지금의 성 안나 성당이다. 그래서 성모님의 탄생이 98일이라기보다는 지금의 성 안나 성당이라고 불리는 이 성당의 봉헌일이 98일이었기 때문에 마리아 탄생 축일이 그 기원이 되었다. 128일 지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역시 이와 전례시기를 맞춘 것이다.

성모 탄생 축일의 전례는 구세사 안에서, 특히 그리스도와 관련지어 성모님의 역할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말씀의 전례는 미카 예언자를 통해 작은 도시 베들레헴에서 하느님의 구원이 어떻게 시작되는 지를 들려주며(1독서), 예수님의 족보와 예수님의 탄생 사화(마태오 복음)에서 성모님의 구세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요셉에게 알려 준다.

이날 전례는 예수님의 인류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의 탄생은 단순한 인간의 탄생이 아니라,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을 보증하는 기쁨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며 교회는 이것을 기뻐하고 그 탄생에서 인류 구원의 희망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미사전례 안에서 기도문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성모님의 탄생으로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고”(본기도), “성모님은 한결같이 순결한 모성을 지니신 분이시다”(예물봉헌기도), 그래서 성모님은 우리 구원에 희망의 빛이 되신다.”(영성체 후 기도)

 

독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려는 사람은 신약성경 처음부터 시작되는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 이야기에 기가 질려 버린다. 이스라엘 역사에나 나옴 직한 족보 이야기가 우리 신앙인들과 무슨 상관일까 하고 의아해한다. 마태오 복음은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시점들로 구분지으며 각각 14대라는 동일한 형태를 가진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랑민족이 이집트에까지 피난하여 거기서 피난처를 찾았던 성조들의 모습, 이집트 파라오에게 억압당하다가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 이집트로부터 탈출해 나오는 백성들과 함께 했던 모세의 모습, 그리고 유배시대에 대대적으로 학살당한 하느님 백성의 모습.

그래서 구약성서를 통독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족보에 나오는 사람 이름의 나열은 그저 단순한 열거가 아니라 바로 이 아기 예수에게서 하느님의 구원 약속들을 최종적으로 물려받는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전체 드라마를 목격하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를 좀 알고 있는 사람은 상당히 가슴 뭉클한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마태오 복음은,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고 하리라.”는 칠백 년 전의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께 이르러 성취되었음을 전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긴 족보도 세세 대대로 준비되어 온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흔적을 보여 준다. 그래서 바로 이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 이야기는 예수님을 들어 높이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하셨던 약속들을 실현시키셨음을 알리는 장엄하고도 엄숙한 선언이요 선포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마리아를 제외한 4명의 여인 그것도 이방인 여인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가나안 여인 다말: 그녀는 자식없이 과부가 되어 고인의 형제와 혼인하여 관습대로 죽은 남편의 후손을 얻으려 했으나 친척들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성전 창녀로 분장하여 시아버지로부터 죽은 남편의 장자 계승권을 이어 받을 아들을 얻은 여인이다(창세 38). 창녀 라합: 역시 가나안 여인으로서, 그녀 덕택에 여호수아가 예리고를 점령할 수 있었다(여호 2,1-21; 6,22-25; 4,21). 오경 랍비 전승에 따르면 라합은 보아즈의 어머니였다. 보아즈는 역시 외국인이었고 그 당시 몹시 배척을 당하던 모압 여인 룻과 결혼한다. : 모압 여인으로서 보아즈와 결혼하여 다윗의 조부인 오벳을 낳았다. 바쎄바: 헷사람 우리야의 아내로 다윗의 비열한 사통의 결과로 솔로몬을 낳았다(2 사무 11).

철저한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제도요 다윗가문의 혈통의 순수성을 자랑삼거나 부족혈통의 순수함이라는 막연한 말로 다윗 가계를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은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 그것도 가장 이상스러운 일, 즉 모두가 이방인이며 유다 가문은커녕 유다 백성도 아닌 4명의 이방인 여인 이름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된다. 이스라엘 구원 역사의 심장부에는 이런 이방인 여인들이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한 몫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도 죄악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달프고 지친 인생여로에서 하느님의 구원약속을 실현해 나가는데 여인의 역할과 복된 탓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바로 오늘 축일 전례 안에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복음은 남성우월주의 사고와는 다르며, 구원이란 죄가 하나도 없는 것만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전례복음은 족보에 이어 요셉의 이야기를 전한다. 곧 메시아께서 다윗의 가문, 다윗의 자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전해진다. 요셉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충실하고 철저하게 사는 사람,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느님께서 갑자기 그의 삶에 끼여들지만 않았다면 참한 여자를 맞아들여 오순도순 소박하게 살아갔을 사람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갑자기 그의 삶에 끼어들어 그가 꿈꾸었던 소박한 행복에 훼방을 놓으신다.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모른 체 하고 임신한 마리아를 받아들일 것인가?”나와는 무관한 일이니 파혼을 선언하고 버리면 된다.”는 생각 사이에서 무척 갈등을 하게 된다. 순박하게 법대로만 살아 온 그에게 너무나 큰 시련이 아닐 수 없다. 미래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배신감, 그리고 절망감 속에서 그가 만약 이 고통을 철저히 맞부닥뜨리지 않았다면 과연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었을까? 고뇌와 걱정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꿈마저 이상스런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고통과 좌절로 철저히 박살이 나버린 그에게 다가가셨다고 전한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꿈이라면 이런 것이 정말 꿈일 것이다. 자신의 인간적인 계획에 어떤 계산도 넣지 않았을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인간적인 계획으로 몇 겹의 갑옷을 입고 있다면 하느님을 만나기 어렵다. 모든 인간적인 욕심과 계획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을 때라야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 그래서 성모신심 축일에 전해주는 전례 안의 성경 내용은 단순한 성모님만을 생각하고 묵상하게 하는 내용이 아니다. 성모신심의 근본적인 교회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엉뚱한 계시나 전해주면서 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역사 안에서 좌절과 절망 중에 희망과 위로를 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1,23)는 선포이다.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의 평지설교에서도 본론에 해당되는 내용(6,27-38)인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르심과 가르침에 응답하기 위해 조건 없는 원수 사랑과 관대한 사랑을 베풀라고 하는 세 가지의 말씀을 하신다. 그 첫 번째가 원수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방법과 황금률(6,27-31)이고, 둘째는 사심 없는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6,32-36)이며, 셋째로 서로 심판하지 말라는 것(6,37-38)이다.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여기서의 원수란 우리들이 단순히 생각하는 개인적이고 국가적 차원의 원수가 아니다. 루카복음의 문맥상 예수님의 복음을 거절한 당대 지도자들이고, 제자들을 미워하고 내쫓고 모욕하며 그들의 그리스도교적인 신분을 배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6,22). 제자들은 예수님(23,34)을 본받아 종교적으로 박해하는 원수들을 사랑해야 한다(6,35; 사도 7,58-60). 그분의 제자들은 교회 공동체의 원수들을 포용하여 친구로 만들어야 원수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1테살 5,15; 로마 12,16-21)와 베드로 사도도 그렇게 가르쳤다(1베드 3,9).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내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박해하고 미워하며 모욕을 주는 타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에 해당된다.

이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내 신앙을 박해하는 종교적인 원수로부터 시작하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원수사랑을 위한 지침으로서 황금률을 제시하신다(6,31). 황금률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구약성경의 가르침(레위 19,18)에 뿌리내린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황금률은 원수를 사랑을 위한 윤리규범으로 적용된 것이다. 황금률은 자기의 관심사와 원하는 바를 제대로 아는 데서 시작한다. 자기를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웃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사랑이란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랑이나 자기 연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대우받기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이웃을 대하라고 하신다. 그것은 상호이익관계를 넘어서는 조건 없는 사랑을 실행하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자비를 남에게 베풀 것인가? 아오스딩 성인은 예수님의 자비는 두 길로, “용서와 관용”, “자선의 두 형태”, “기도의 두 날개로 드러난다고 했다(설교집206,2; 205,3; 179A,1). 용서는 자비로운 행동으로 표현된다. 사랑과 용서와 자비가 주님한테서 오기 때문이다. 이 용서가 흘러넘치면 관용이 흘러넘친다. 이렇게 관용은 하느님한테서 온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고 하신다. 우리는 자비가 하느님의 속성임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자비 실천은 우리에게 복수심을 없애는 것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 둘로 이루어진다.

처음 오늘 복음을 읽을 때는 다소 산만하게 다가왔던 내용이었다. 다시 정리해보면, 예수님은 참 행복을 선언하신 후에 제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윤리를 말씀하신다(루카 6,27-49). 윤리 가운데 원수 사랑이 평지 설교의 핵심을 이룬다. 6,27-31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이런 사람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황금률(6,31) 때문이다. 신앙인은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남들처럼 보상을 바라듯이 혹은 같은 이해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처럼 하지는 말라는 말씀을 하신다(6,32-34). 이렇게 처신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비”(6,36) 때문이다. 하느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고 또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노력과 정성을 쏟는 만큼의 결과와 보람이 눈에 띠게 나타나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내가 좀 관심을 가져주고 자비를 베풀었다 해서 그 사람이 쉽게 변화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 또한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다고 해서 과연 그 사람이 그 마음을 헤아려주고 진정으로 고마워할까?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잘못되고 불의와 악 앞에서 무조건 순응하고 양보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내용은 우리의 본성을 무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좀더 살펴 파악함으로써 좀더 높은 차원으로 딛고 올라설 수 있도록 이끌고 계신다. 율법에 따르면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라고 하는, 그 당시 통상적으로 알려진 동태복수법’(탈출 21,23-36)이 있다. 사실 우리는 선익이라는 것을 빙자하여 손해를 손해로 되갚으려 하거나, ‘정의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기어이 되갚아주려는 증오심과 보복심리에서 나오는 앙갚음으로 인해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과잉되거나, 무자비함, 더러는 왜곡된 정의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앙갚음하지 말라는 것이지, 악에 대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또 다른 오해이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6,28) 원수들을 사랑하라고 하신다(6,35-36). 같은 방법으로 되돌려준다는 것은 결국 똑같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미움과 증오심에 대한 보복을 폭력과 힘으로 갚아나간다면, 먼 훗날 이 세상 안에서 사랑과 자비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폭력이나 이념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고 은혜와 자비를 베풀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의한 사람들을 회개시켜 나가는 지독히도 역설적인 사랑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까닭은 심판과 처벌을 우리 인간보다 더 정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맡기고자 하는 강한 신뢰심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소중하게 여겨지고 마음이 끌리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상처를 준 원수를 사랑하자면 감정의 문제를 넘어 의지(意志)의 문제가 된다. 이것은 노력 없이 생겨나는 자연스런 감정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를 동반해야지만 가능한 것이다. 사실 용서한다는 것은 보복과 증오심보다도 더 큰 용기와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야기가 남을 단죄하거나 비판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남을 심판하는 것은 세리를 비판하는 바리사이들(18,11-14)처럼 윤리적으로 해이한 사람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그를 하느님께 인도하기 어려운 죄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즈음해서 성무일도 3주간 월요일 아침기도 성경소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법에 따라 장차 심판 받을 사람들이니 그런 사람답게 말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십시오.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2-13)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한단 말입니까?”(야고 4,12)

죄인들을 단죄하기보다 구원하기를 더 바라시는 자애로우신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이러한 특성을 본받아 남을 단죄하기는커녕 남의 잘못을 용서하여 그분께 제 잘못을 용서 받을 수 있다. 다른 이의 죄를 찾거나 이웃의 허물을 들추느라 바쁜 대신에 오히려 하느님 앞에 엎드려,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130, 3)라고 고백한 시편 제자야 말로 복된 사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독서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해주고 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콜로 3,12)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본받도록 소명을 받은 새 계약의 백성의 특징적인 성격을 드러내야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특히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올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3,13)고 한다.

콜로새서는 하느님께 선택받은 거룩한 사람들은 고상한 위엄이나 권위를 갖추어야 하거나, 더욱이 그들이 무슨 벼슬을 받은 사람처럼 위세를 부리거나 신자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서 당연히 존경과 예우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늘 독서인 콜로새서가 권면하는 다섯 가지 덕목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3,12)를 들고 있다. 냉혹하고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약하게만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늘 굴복하는 듯한 처신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덕목인 인내는 다른 나머지 덕목들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우리의 영적인 원수가 우리에게서 빼앗으려는 것도 우리의 인내이다.

이러한 태도를 지니기 위해서 콜로새서는 그 무엇보다도 사랑을 입어야한다고 권고하는데, “사랑은 이 모든 것들을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3,14)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3,15) 될 것이고 그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부르며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3,16-17).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라”(3,16)는 권고를 듣는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머무를 때만이 다른 이들에게 하는 말과 행동이 주제 넘거나 오만하지 않고 지혜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